소설

풍성한 책방 : 여우들은 밤에 찾아온다

풍성한 그림 2021. 7. 16.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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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스 노터봄  213  문학동네

 

곤돌라

 

과거의 어떤 일이 일어났으면

대부분 현재와의 거리, 시간, 소멸,

망각이 뒤따르는 법이다.

때로 생각이 나거나

기억이 뚜렷하지 않은 게 정상이다.

다만 그 일로

마음이 편치 않은 일만 없다면

그렇게 지나가버린다.

 

 

뇌우

 

순식간에 여름이 지나갔다.

()을 이룬 회색 구름들,

구름이 드리워 거무칙칙해진

스페인풍의 하얀 집들, 그리고

갑작스러운 정원의 침수,

비가 올 때면 그렇게 맹렬했다.

 

 

헤인즈

 

삶은 떠나 생()의 문을 닫을 때

하찮고 의미 없는 비밀들을

갖고 사라질 희망은 있다.

그 비밀이 무엇이든 간에

나는 임무를 완수했다.

인생, 그게 무슨 의미인지

누가 내게 말해줄 수 있는가?

나는 인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오랫동안 깨닫지 못했지만,

어쨌든 지난 천년은

인간종()에게 거대한

스트립쇼였다고 생각한다.

 

 

9월 말

 

라디오에서 세상의 소리가 들렸고,

그녀 앞에는 세상의 모습이 보였다.

낙엽이 텅 빈 거리,

말 잘 듣는 개처럼

바람이 잦아들고 있었다.

모든 것이 원래 그대로였다.

 

 

마지막 오후

 

꽃잎들은 떨어지기 전에

이미 수의(壽衣)로 몸을 감싼 듯

저절로 동글게 말려 있었다.

꽃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파울라

 

나이가 들수록

점점 인생이란 게

상상의 산물 같아 보이기 시작하는 건

어찌된 일인가?

늙음과 죽음 둘 중 어느 것이

더 나쁘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당신은 나이들지 않았고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재미로만 도박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도박에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다.

프레이어들의 씰룩거리는 턱,

곁눈질하는 눈빛,

누군가

갑자기 떠나려고 일어나는 모습,

지나치게 관대한 팁,

그중 매번 가장 흥미로운 건

딜러의 모습이다.

 

 

 

파울라

 

무한히 먼 거리,

징표들, 형상들, 숫자들,

믿을 수 없는 고요 속의 필적,

잠시 뒤 용기를 내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물었다.

당신은 매일 밤

살고 싶지 않은 기분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고 대답했다.

당신은 반어적으로 말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밤이면 그런 순간이 찾아오는 걸

알았기에 당신은 늘 두려워했다.

당신의 목소리에서 두려움을 들었다.

 

 

가장 먼 곳

 

파도의 굽이침은

전쟁이며 위난(危難)이다.

바위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지고

높이 치솟는 거대한 회색파도,

부서진 파도가

높은 굉음을 내며 다가왔다

다시 허공을 날고 싶은 듯

밖으로 뛰쳐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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