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에세이

풍성한책방 에세이 : 아무튼 연필, 김지승,제철소

by 풍성한 그림 2024. 9. 17.
728x90
반응형

아무튼 연필

 

김지승   219   제철소

 

프롤로그

-기록과 흔적

 

나는 주로 세상에 없는 이들만을 사랑해왔는데,

글을 쓰는 동안에는 그만 수많은 예외가 생겼다.

이글이 또한 그런 예외적

사랑의 흔적으로 남는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1부 연필

 

연필이 지리학

 

어른들은 나를 두고 무신경하게 말했다.

들으라고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는데

들어도 별수 없고인 말이긴 했다.

그때마다 보이지 않는 손가락 하나가

내 이마를 천천히 힘주어 미는 듯했다.

 

경계에 있는 어딘가와 어딘가,

누군가와 누군가를 위해

사이를 건축할 줄 아는

지리학적 상상력을 무엇보다

갈망한 건 그때부터다.

 

검색창에 연필을 입력하세요

 

나 우울해,

그 한마디만 몸 밖으로 털어내면

어찌어찌 또 몇 문장

밀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시간에는

그 한마다 들어줄 사람 찾기가 쉽지 않다.

우울함을 토로해도 미안하지 않은 친구들이

자고 있거나 한창 직업 할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혼자 해결한다.

연필을 쥔 여성 작가 이미지를 찾는 것으로,

 

다이아몬드와 같은 이름

 

사람은 그렇게 강하지 않아요.

그 말이 여전히 내 옆에 있다.

그럼 나는 잘 무너지고

부서지는 사람들 곁에 있기로 한다.

강함과 약함이 어디에서 기인하고

그걸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지,

그 각각의 의미와 위계는

누가 정하는 것인지를 자문하면서.

 

PPP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건

이상하게 결국 그렇게

되고야 마는 일이었다.

좋아하는 A와 전혀 상관없던

BC, 셋 사이에서

희미한 연결선을 발견하고야 마는 일,

그 위에 또 다른 선들을

굵고 진하게 덧그리며

DF로 확장해나가는 수순에 대해

한 친구는 그게 덕질의 기초이자 정석이지! 했고,

다른 친구는 진작 공부를 그렇게 했으면

정말 재미있었을 것 같지 않냐고 되물었다.

내가 둘 중 누군가와 더 친한가는 비밀이다.

 

아무튼, 코끼리가 될 뻔한

 

나는 지지할 것을 구하는 심정으로

H에게서 받은 연필을 찾아 가방을 뒤졌다.

없었다. 왜 없지?

연필이. 그제야 연필을

카페 테이블에 놓고 나왔다는 걸 알았다.

 

어떤 마음은 너무 오래 산다.

너무 그렇다.

 

마녀의 빗자루

 

어지럽게 이어지고

틀어지는 골목마다 쪼그려 앉아 있다 보면

귀 기울이지 않아도 들리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이야기들.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들.

 

그래파이트 타투

 

내가 궁금했던 건 소문이 진위였다.

고리가 자꾸 길어지는 소문이었다.

진실이 드러나려 하면

돌연 연막이 쳐지고 흐지부지 넘어가다 보니

숨의 역사가 점점 길어졌다.

 

스페인 프리힐라아나의 실비아 씨

 

나는 정말 괜찮았어요.

연필이 단종되기 전

당신이 구매한 세트 가격이 판매가였으니까요.

시간, 선호도, 희소성, 단종 등의

프리미엄이 전혀 붙지 않은 그대로 말이에요.

내가 괜찮다고 여러 번 얘기했지만

당신은 배송비를 줄이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나도 하지 않는 고민을요.

 

연필 장례식

 

혼자이고,

공기의 흐름이 들릴 정도로 고요하며,

낮에 붙잡고 있던 세상과의

연약한 연결점이 사라진 새벽,

잠드는 게 제일 무서운 일이 되면

나는 거실에 난

작은 창 너머로 언뜻 푸른빛이 돌기 전까지

창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몸이 힘들 보이는 곳에 이부자리를 펴고 누웠다.

아픈 사람에게는 창이 신전이다.

그저 바라보고 있는 시간이 온통 기도다.

 

 

2부 연필들

 

버지니아 울프의 연필

-딸들은 다시 혼자 걸으며 자란다

 

엄마는 공항에서 밥 잘 챙기라거나,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 대신

기죽지 마. 알았지?” 하고 나를 안았다.

나는 기죽지 않았다.

영어를 못해도,

따라잡아야 할 공부가 까마득했어도,

매일 밤 줄일 수 있는 식비를 계산하면서도.

진짜 기죽고 몸이 짜부라질 것 같은 일들은

한국에 남겨놓고 도망쳤다는 걸 나는 알았다.

 

다와다 요코의 연필

-펜슬과 엠피츠 그리고 블라이슈티프

 

나는 가방 안에서 연필을 꺼내 손에 쥐었다.

낯설었다.

처음 보는 무언가가

내 손안에 세상에서

제일 짧은 경계선처럼 놓여 있었다.

이 사물을 어떻게 불러랴 할지 난감했다.

나무이고,

흑연에 물과 점토를 섞어

불에 구우니 물이고 흙이고 불인 이것.

금속 페룰까지 날렵하여 쇠금이기도 한

이것은 무엇일까.

부를 이름이 없어 나는 결국 아아,

모르겠다 하고 울었다.

 

 

최윤의 연필

-연필이 연필이기를 그칠 때

 

오래전 어떤 사건 피해자들의 대리인으로

입장문 작성을 위해

피해자들의 조각들을 정리하면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건 어떤 느린 마음들을 기다리는 일이다.

독촉할 수 없는 마음들을 기다리면서

그들과 나를 지키는 일이다.

연필은 그런 기다림에 좋은 동행임을 그대 알았다.

그들이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연필을 만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마침내 피해자가

그건 범죄 사건이었지 사랑이 아니었다고 쓸 때.

매일 아침 죽고 싶다고 쓸 때.

너는 죽이고 싶었다고

더는 망설이지 않고 쓸 수 있을 때,

가해자의 변명을 보도하지 말라고

분노하며 쓸 때.

그들 손에 밀착되어 있던 연필은

연필이지만은 않았다.

 

밀레나 예젠스카의 연필

-나는 그의 공포를 압니다

 

밀레나가 연필로 썼지만

행복하게 읽은 이유에 대해,

카프카는 그 편지가

평화로웠기 때문이라고 썼다.

자신의 두려운 마음은

세상으로부터의 퇴행을 의미하고,

밀레나의 용기는 전진을 의미한다고도.

 

 

 

 

도로시 파커의 연필

-진심 어린 농담

 

나는 도로시의 신랄한 말과

글을 퍽 좋아해서, 낮게 비행하며

날카로움을 숨기지 않는

그의 시선만큼 해부용 칼날 같은

입술에도 애정을 느꼈다.

사진 속 그는 꼭 쥔 연필에는 물론이고,

육각 연필 한 면에 올린

오른쪽 두 번째 손가락의 각도에도

어색하게 진심인 듯 보였다.

 

조이스 캐롤 오츠의 연필

-세계는 여러 번 진행된다

 

죽은 사람은 서서가 멈춘 사람이다.

그래서 이길 수가 없다.

승패를 말하는 게 아니라,

가루나 흙에 물을 부어 반죽하다

혹은 빨래 같은 걸 이리저리 뒤치며

두드리다라는 의미의 이기다다.

우리는 누군가에 대해

또 그 관계에 대해

다른 서사를 상상하고 쓰면서

의미를 삶에 이긴다.

반죽하고 뒤치고 두드린다.

하지만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그러기가 힘들다.

살아남은 사람의 시선과 욕망으로

그 관계는 재구성될 수밖에 없다.

 

조앤 디디온의 연필

-먼저 떠나는 꿈

 

조앤이 남편을 잃고 쓴

상실 속 그 표정을

조앤이 쓰던 연필과 같은 시대의 나무,

흑연으로 만들어진

몽골 482를 손에 쥐고 내가 짓고 있다.

 

사랑하는 이를 상실한 사람들이

꾸는 꿈은 어딘가 닮았다.

내 꿈에서 먼저 떠나는 사람은 늘 나였다.

 

넬리 블리아이의 연필

-연필을 깎는다는 것

 

한 달을 나란히 앉아 지낸 사수로부터

넬리 블라이 이름을 처음 들었다.

그는 사표를 쓰고

내게 인수인계를 해주느라 남아있었다.

그 여자가 내 꿈이었는데.

사수는

꿈이 너무 허무맹랑했던 것 같다고 하면서도

넬리 블라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눈빛이 달라졌다.

누굴 좋아한다는 건 저런 거였지.

나는 다 잃은 사람처럼,

혹은 다 잊은 사람처럼 반응했다.

 

 

루이자 메이 올컷의 연필

-욕망하라, 죄책감 없이

 

친구들과 나는 대체로 가난했다.

가난한 게 자랑이 아니라는 건

많은 사람이 동의하는 듯한데

그렇다고 창피한 일 역시 아니라는 점에는

아직 합의가 덜 된듯했다.

우리는 가난하다고 말한 다음

우리를 보는 시선이 자주 당황했다.

시선만으로 그치는 사람은 드물어서

어떤 말은 상처가 되거나

마음에 꾹 눌린 자국을 남겼다.

가난과 관계하는 것들은

글로 표현이 잘 되지 않는다.

표현할수록 낮아지거나,

다른 문장과 만나면

거짓말이 되는 말들이 있는데

가난이 꼭 그렇다.

 

부록

-슬기로운 연필생활

 

우리가 알아야 할 연필에 관한

기초 지식은 초등학교에서 다 배웠다.

기억이 안 날 뿐이지.

처음 글자를 배우고 익히면서

즐겨 쓴 연필의 이름과 이유가 있었다.

기억이 안 날 뿐이지.

괜찮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