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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풍성한책방 에세이 : 반짝이는 밤의 낱말들, 유희경,아침달

by 풍성한 그림 2024.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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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이는 밤의 낱말들

 

유희경 318 아침달

 

당신에게/

적요란 참 오래된 것이지요.

그것은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아니 인간의 짧은 역사로는

가늠할 수 없는 때부터 있었던 현상.

아무것도 없다가 조금씩 드러나는 어떤 감정.

그 감정의 낱말들.

익숙한 듯 낯선,

처음인 동시에 처음이 아닌 그런.

 

. 밤의 낱말들

1

낯설고 먼 곳의 오래된 성당에서

 

손금/

나는 궁금하지 않았다.

시간이 어떤 모양으로 다가올지에 대해서.

 

졸음/

아득해졌다. 모든 것이 고요하다.

나는 자리에 앉아서 움직이지 않았는데,

그건 아주 작은 조각구름과 같아 보이기도 하고

적적해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니 아득해졌다는 표현이 아니고서는

그때를 설명할 수 없다.

 

불안/

괜찮다가 아니라

괜찮지 않다가 되어서 그림자를,

딱 그만큼의 그림자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빛의 것이며 그것은

슬프지도 아프지도 무섭지도 않으며

다할 때까지만 있는 것이다.

 

버스/

그동안의 흔들림이

한꺼번에 찾아오기라도 한 듯.

마침내 그날이,

날 이후의 삶이 덜컹이며 지나갔다.

 

2

우리는 저녁에 만났다

 

엽서/

글씨가 덜 자란,

나 같은 사람에게 엽서의 여백은

너무 넓고 막막하다.

그리하여 어떻게 적어 내려가든

단어와 문장은 갈피를 잃어버린 채

갈 곳을 잃는다.

펜을 내려놓고

팔짱을 낀 채 먼 곳을 본다.

 

코트/

버스는 오지 않고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가

조금 더 두툼한 옷으로 바꿔 입고 싶어졌다.

그렇다면 또,

한 해의 일부가 사라져버릴 것 같다.

옷장 속에 들어가 나오지 않을 것 같다.

떨고 있는 몸을 바로 세우면서

나는 나의 고집을 이해하지 못한다.

계절은 아낄 수 있는 게 아닌데.

코트 한 벌로 붙들어 둘 수 있는 것도 아니다.

 

 

. 밤의 문장들

 

어린 시절엔 착하다는 말을

참 많이 들었어요./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는 내가 얼마나 착하지 않은지

깨닫게 됩니다. 착하지 않은

것뿐 아니라 너무 못돼서 이따금 스스로도

변명해주지 못하곤 합니다.

샘도 많고 마음도

비좁아서 이런저런 사정을 받아주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언제나 나를 앞세웁니다.

어쩌면, ‘당신이라는 단어에

이리 집착하는 것도

이 때문일지 모르겠습니다.

자꾸 앞에 가려는

나를 막으려고,

나를 감추는 당신이라니,

나의 못됨이 발명한 당신’.

 

생일이 봄인 사람은 다정하대요./

 

나는 나의 생일이 봄 중에 있다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나는 다정한 사람이 아니니까요.

한 번도 어떤 것이 태어날 수 있게 꼭 안아준

경험이 내겐 없습니다. 쌀쌀맞다 싶게 매사

무관심한 그런 사람.

 

 

 

에필로그

 

당신에게/

기억은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일까요.

하나의 완결된 사건이 되지 않음에도

생생하게 남아 있게 되는

그런 것들이 어째서

나의 삶에 간섭하게 되는 것인지

새삼 나는 궁금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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