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은
성인을 위한 동화
한강/글 김세현/그림 111 문학동네
p68
세찬 비가
내 잎사귀를 때릴 때마다
휘청휘청 쓰러지려 하는 몸을
나는 꼿꼿이 곧추세우고 있었습니다.
오후 들어 비가 그치며
기온이 내려갔습니다.
구겨지고 젖은 꽃잎을 할퀴며
저녁 바람이 지나갔습니다.
이슬이 흘러내리려 할 때마다
나는 담을 넘어가 버린 담쟁이의
짙푸른 다리를 내려다보았습니다.
“울지 마”라고 담쟁이는
나에게 말했었지요. 이슬이 식으면
몸이 차가워져서
더 견디기 힘들 다구요. 간밤에
그 풀도 말했습니다.
더 강해져야 한다구요.
더 견뎌야 한다구요. 그날 밤
나는 울지도 소리치지도 않았습니다.
힘이 빠질 때면
흙더미 아래 갇혀 있을
얼굴 모를 풀을 생각했습니다.
그의 조용하고 다정하던
말씨를 생각했습니다.
작가의 말 중에서
그런 것들이 있다.
아무리 절망하려야
절망할 수 없는 것들,
오히려 내 절망을
고요히 멈추게 하며,
생생히 찰랑거리는
‘지금 이 순간’을
열어 보여주는 것들
이를테면, 갓난아이의 얼굴만한
복숭아 다섯 개를 선물 받은 뒤
차마 먹지 못하고
식탁에 올려놓고 있었다.
“사흘 전, 수요일에 떤 거래요.”
선물한 이는 말했다.
덜 익은 채 수확돼서
유통 중에 익는 과일들과는 달리
단맛이 끝까지 들었다는 것이다.
“아는 사람이
농장에 있어서 가봤거든요,
권하기에 한번 맛을 봤는데
얼마나 달던지…….”
다섯 개의 커다란,
섬세한 주황빛이 도는, 말랑말랑한,
흰 솜털이 돋은 복숭아들,
그 둥근 윤곽선, 가운데를 따라
얄따랗게 파인홈,
날큼하게 솟은 꼭지까지,
어쩐지 성스러운 느낌이 들게
어여쁘다. 완전한 아름다움이다.
차마 칼을 댈 수 없다.
몇 번 망설이다가 하나를 골라,
공들여 씻은 뒤 껍질을 벗긴다.
흘러내리는 향긋한 즙을
혀끝으로 핥아본다.
한 조각을 잘라 입에 넣어본다.
아, 눈부신 맛이구나.
황홀하게 달콤하구나,
흐르는 시간을 멈추게 할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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