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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풍성한 책방 : 깊이에의 강요

by 풍성한 그림 2020.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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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평가하는 어리석음,

이 순간

날 사로잡는 것은 무엇일까.

 

파드리크 쥐스킨트 100 열린책들

 

p15 깊이에의 강요

한때 그렇게

그림을 잘 그렸던

젊은 여인은 순식간에 영락했다.

그녀는 외출도 하지 않고

방문도 받지 않았다.

운동 부족으로 몸은 비대해졌으며,

알코올과 약물 복용 때문에

유달리 빠르게 늙어 갔다.

집 안 여기저기

곰팡이가 슬기 시작했고,

그녀에게는 시큼한 냄새가 났다.

 

p23 승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리를 뜬 8월의

어느 날 초저녁, 룩상부르 공원의

서북쪽 구석에 위치한 정자에서

두 남자가 체스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열 명은 족히 넘는 구경꾼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관심 있게

체스 게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저녁 식사 전

입맛을 돋우기 위해 술 한잔

마실 시간이 가까워졌는데도,

승부가 결판나기 전에는

이 구경거리를

포기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p66 장인(匠人)뮈사르의 유언

조개와 조개 성분이

부단히 증가하는 원인은

끊임없는 물의 순환에 있다.

바다에서 사는 보통 조개들처럼

돌조개에게도 물은

가장 긴밀한 동맹자,

바로 존재의

기본 원소이기 때문이다.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물은 영원한 순환을 보여준다.

그것은 태양 빛의 힘을 빌어

바다 위로 상승하여

구름으로 뭉쳐지고,

이 구름은

바람에 아주 멀리 날아가

육지 위에서 흩어진

다음 빗방울의 형태로

물을 대지 위에 쏟아붓는다.

물은 땅을 적시며

구석구석 스며든다.

 

 

p86 문학적 건망증

유감스럽게도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

책 제목이나 저자의 이름,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나 곧 보게 될 것처럼,

그런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아니 그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문제의 규명에 도움이 된다.

말한 것처럼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책은

훌륭한 것으로, 문장 하나하나에서

얻는 바가 크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의자를 향해 비틀비틀 걸어가고,

읽으면서 자리에 앉고,

읽으면서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읽고 있는지조차 잊어버린다.

오로지 나는 책장을 넘길 때마다

발견하는 다시없이 귀중한

새로운 것에 정신을 집중한 욕망

그 자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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