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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풍성한 책방 : 지평

by 풍성한 그림 2020.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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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현실과 미래가

혼란스럽게 공존했던 시절의 지평을

지금 찾았을까,

젊은 날의 지평을 회고하는 주인공.

 

파트릭 모디아노 197 문학동네

 

p9

얼마 전부터 보스망스는

젊었을 적의 일화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이어지지 못하고

덜컥 끊겨버리는 일화들을,

이름 없는 얼굴들을,

스치듯 지나가버린 만남들을,

그 모두는 아주오래된

과거의 한 시기에 속했으면서

그의 생애의 여타 시기와

연결되지 못한 채 영원한

현재 속에서 유예되어 있었다.

그가 아무리 그것들에 대해

혼자 의문을 제기한들

대답이 돌아올 리 없었다.

기억의 파편들은 영원히

불가사의로 남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는

그것들의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했고,

어떤 날짜, 특정 장소,

철자가 가물가물한 이름 등

지표가 될 만한 것이나마

찾아내려 애썼다.

 

p91

긴 밤이 온전하게

그의 것이었다. 그는

그 구역에 더 머물고 싶었다.

그는 생의 한 교차로에,

보다 정확하게는 미래를 향해

도약할 수 있는 한 경계에

도달한 느낌이었다.

처음으로 그의 머릿속에

그 단어가 떠올랐다. 미래,

그리고 또 하나의 단어, 지평,

그 시절의 저녁,

그 구역의 조용하고 텅 빈 거리들은

모두 미래와 지평으로 통하는

탈주로였다.

 

 

 

p102

그녀는 그달 초에

스무 살이 되었다. 생일 당일에도

바게리안에게는

얘길 꺼내지 않았다.

그녀는 생일 축하를 받는 것에

익숙지 않았다.

그것은 가족과

친한 친구들과 더불어

이정표가 곳곳에 서 있는 길을

가는 사람들,

그 길을 따라가다

중간중간 쉴 수 있고, 그러다

다시 일정한 보폭으로

여정에 나설 수 있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와는

딴판으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비약과 단절로 이어진 삶을 살아왔으며,

그때마다 제로에서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런데 생일이라······

그녀는 벌써 여러 번의 삶을

산 것 같았다.

 

p147

그가 딛고 선 땅이

푹 꺼져 들어갔다.

지난 사십 년 동안

기둥들을 떠받치기 위해 기울인

그 많은 힘이 무슨 소용이었나?

그것들은 다 썩어버렸는데.

광장을 가로지르는데

현기증이 밀려왔다.

그 저쪽에 보이는,

유년의 어느 오후에

그 붉은 머리 여자

-이른바 그의 어머니-

가짜 투우사를 피해

숨어들었던 성당의 이름을

혼잣말로 여러 번 소리 높여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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