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길 265 걷는 사람
형사K의 미필적 고의
목에 걸린 가시가 시간이 갈수록
살 속으로 깊이 파고들 듯이
형사K의 말이 당신의 신경 어느
한구석을 집요하게 찔러 왔다.
당신은 일말의 가능성도
의혹하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가 없었다.
악의적 결과를 예견하지도
갖가지 합리화로 그 의혹을
덮어버리며 했던
무수한 행동들이 떠올랐다.
동파
겨우내 얼어 가는 콘크리트 온도는
영하 10도 이하이지,
그 속의 수도 배관도 흐르지 않으면
금방 영하로 떨어져서 얼어 버리지.
미세한 충격이나
작은 온도 변화에도
금세 얼어 버리는 게야.
아무도 모르게
동파될 준비가 되어 있는 거지.
관리인
우편함 크기의
작은 창이 철컥 열렸다.
늙은 인쇄공의 하품처럼 천천히,
경비원이 창틈으로 주변을 살폈다.
덩달아 고개를 돌려
등 뒤를 살피지만
잔뜩 구겨진 먹구름과
산비탈의 빽빽한 나무들, 그리고
스산한 바람 소리뿐이었다.
창이 닫히자 묵직한 파열음을 내면서
철문이 서서히 열렸다.
잡식동물의 딜레마
냄새는
스펙트럼이 넓은 파장일지 모른다.
때문에 무수한 각 지점들이
같은 냄새라 할 수 없다.
각각의 냄새는 독립된 하나의 세계이다.
그러니 새로운 냄새를 맡았다는 건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것이다.
실종
박용석은
백열등이 희미하게 비치는
한 평 남짓한 공간을 둘러봤다.
말라비틀어진 빵 조각 위에
바퀴벌레 서너 마리가 스멀거렸다.
따뜻한 물 한잔이 간절했다.
그는 혀 밑에 고인
한 모금의 침을 간신히 삼켰다.
카라반
그랬다. 시간은 그들 부부를
전셋집에서 대출받은 아파트로 옮겨놓고
갓난아이를
사춘기 중학생으로 키웠다. 그리고
남편과 미란이
부동산과 주가지수에 대해
토론하는 모습을 무덤덤하게
바라보게 했다. 하지만
두꺼운 줄 알았던 시간의 켜는
남편과 미란이 수시로 주고받은
문자메세지를 보고
먼지처럼 허공에 흩어졌다.
피터의 편지
어쩌면 시간이란
기억의 잔가지들을 잘라내고 접붙여서
스스로 원하는 해답에 이르게 하는
물리적인 단위일지 모른다.
강은 시간이 가면서 눈동자의 메시지가
햇병아리 오퍼레이터에게
기계실을 떠나 새로운 길을 모색하라는
의미로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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