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런 코벤 535 비체
p28
잘 접어놓은 종이가 보였다.
조심스럽게 펴보니<뉴스위크>
기사였다. 숨진 십대
아이들 네 명의 사진이 보였다.
여름 칼잡이의 첫 희생자들,
그들은 항상
마고 그린의 사연부터 소개했다.
그녀의 시신이
가장 먼저 발견됐기 때문이다.
더그 빌링엄의 시신은
그다음 날에 발견했다.
하지만 훨씬 더 흥미로운 것은
나머지 두 명의 경우였다.
길 페레즈와 카밀의 혈흔과
찢어진 옷은 발견됐지만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p80
아버지를 떠올렸다.
숲, 그리고 삽,
어린 딸을 찾아 나선
아버지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
이내 어머니도 떠올랐다.
어머니는 가출한 이후부터
행방을 알 길이 없었다.
가끔 어머니를 찾아 나서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자주 찾아드는 충동은 아니지만,
아주 오랫동안
어머니를 증오해왔으니까. 어쩌면
아직까지도 그 증오가
남아 있는지 모른다.
이제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됐으니
어머니가 겪었을 고통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p124
나이 때문인지 마약 탓인지는 몰라도
아버지에게 조기치매가 찾아들었다.
아이라는 항상 멍한 모습이었고
과거에 갇혀 살았다. 그런 이유를
처음에는 치매 진단이 쉽지 않았다.
적어도 의사들의 설명은 그랬다.
하지만 루시는 그해 여름의 충격이
원인이었을 거라고 믿었다. 아이라는
숲속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온갖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캠프장의 소유주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몰랐다.
언론도 그렇지만
유족들의 비난은 특히 심했다.
마음 여린 아이라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결국 그는 무너지고 말았다.
p192
아내는 부모님과 의논해
매장지를 골랐다. “부모님껜
무척 의미 있는 일이에요.”
숨을 거두기 전 아내는
그렇게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녀의 부모, 특히 어머니는
딸을 위해
큰일을 했다며 마음의 짐을 덜었다.
난 그 일에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심각한 제인의 상태를
지켜보면서도 현실을 부정하기 바빴다.
죽음은 그냥 죽음일 뿐이다.
종국, 끝,
더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결승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화려한 관과 잘 관리되는 묘지도
그 사실을 바꿔주지 못한다.
p233
어젯밤 그녀는 폴에게
연락해보기로 결심했다.
그도 이 문제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술기운에
성급히 내린 결정인지도 모른다.
날이 밝았고, 정신도 말짱하니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 시간 후, 그녀는 컴퓨터로
폴의 사무실 연락처를 알아냈다.
그는 에식스 카운티 검사였다.
그리고 홀아비였다.
제인은 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폴은 아내의 이름으로
자선사업을 시작했다.
루시는 그 사실에 대한
자신의 솔직한 감정이 궁금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p288
“아주 나쁜 소식이야.”
나는 손가락을 까딱이며
얘기해보라고 신호했다. 데이브가
조앤 서스턴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지금 우리 수사관들이
제인케어라는 자선단체의
사무실을 수색하고 있어요.
영장은 이미 발부됐고요.
그곳의 모든 기록과
파일을 압수해 올거에요.
최대한 조용히 처리하려고 했는데
벌써 언론이 냄새를 맡아버렸어요.”
p336
연쇄살인은 스트레스가
전혀 없는 범죄인 모양이다.
20년이 지났지만
웨인 스튜벤스는
변한 데가 하나도 없었다.
지금도 그는 당시와 같이
서글서글한 인상이었다.
웨이브 있는 장발 대신
짧게 깎은 스포츠머리였지만
잘 어울렸다.
매일 한 시간씩 허락되는
야외활동 시간을
뙤약볕 아래서만 보내는지
피부는 보기 좋게 그을려 있었다.
p375
굶주릴 때는 행복과 성취에 대해
걱정할 여유가 없다.
그건 평생 가슴에 새겨야 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부에 파묻혀 살다보면
영성과 정신건강과 만족과
인간관계 같은 난센스들을
걱정하게 된다. 자신이
얼마나 행운아인지도 망각하게 된다.
굶는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점점 뼈만 남아가는
자신을 지켜보는 기분이 어떤지,
사랑하는 이가
서서히 죽어가는 걸
무기력하게 지켜보는 기분이 어떤지,
그리고 젊고 건강했던 누군가가
굶어 죽으면 이제
빵을 한입 더 베어 먹을 수 있다는,
본능적으로 찾아드는
행복감도 결코 알지 못한다.
p414
“내 동생이 숲에서 살아나왔다면
아마 혼자 나오진 않았을 거예요.”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입을 열어 보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글렌다 페레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녀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은 촉촉이 젖어 있었다.
p452
우리는 걸음을 멈췄다.
아이라가 언덕을 내려다보았다.
내 시선도 그를 따라 움직였다.
이제는 맨션의 지붕만이
살짝 드러나 보일 뿐이었다.
우리는 우거진 숲속에 들어와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가쁜 숨을 몰아쉬는 중이었다.
아이라의 얼굴이 창백했다.
“더이상 파헤치지 않는 게 좋겠다.”
~“절대 놓지 않을 겁니다.”
나는 말했다.
아이라가 고개를 끄덕했다.
그는 무척 슬퍼 보였다.
그가 판초 안으로 손을 넣고
권총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그걸로 나는 겨눈 후
말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p525
카밀은 숲속에서의 일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웨인 스튜벤스가 저지른 범행에 대해
털어놓지 않았다. 옳든 그르든
카밀이 그런 선택 때문에
무고한 생명이 더 희생됐다.
나 역시 무엇이 옳은 일인지 모른다.
진즉에 모든 걸 털어놓았으면
이 비극은 벌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물론 그 반대일 수도 있고
어쩌면 웨인은
체포될 위기를 모면하고
도망쳤을 수도 있다.
그냥 유럽에 남았을 수도 있고,
더 빈틈없이 준비해
완벽한 살인을 이어나갔을 수도 있다.
그걸 누가 알 수 있겠나?
하지만 꼭꼭 담아둔 거짓말은
결국에는 곪게 돼 있다.
카밀은 그 거짓말을
영원히 묻어둘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 모두
같은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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