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189 문학동네
p36
죽음이 매번 그녀를 비껴갔다고,
또는 그녀가 매번 죽음을 등지고
앞으로 나아갔다고 생각한다.
죽지마, 죽지 마라 제발.
그 말이 그녀의 몸속에
부적으로 새겨져 있으므로,
그리하여 그녀가
나 대신 이곳으로 왔다고 생각한다.
이상하리만큼 친숙한,
자신의 삶과 죽음을 닮은 도시로.
p55
엉망으로 넘어졌다가
얼어서 곱은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서던 사람이,
여태 인생을 낭비해왔다는 걸
깨달았을 때, 씨팔
그 끔찍하게 고독한 집구석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게 뭔가.
대체 이게 뭔가 생각할 때
더럽게도 하얗게 내리는 눈.
p81
이따금
각설탕이 쌓여 있는 접시를 보면
귀한 무엇인가를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게 모든 걸 물들이고
망가뜨린 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p103
의식 없는 상태로
아기가
젖을 물고 조금씩 삼켰다.
점점 더 삼켰다.
여저히 눈을 뜨고 않은 채,
지금 자신이 넘어오고 있는 경계가
무엇인지 모르는 채.
해설 권희철 문학평론가
‘흰’은 단순한 하얀색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색들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며, 그것의 밑바닥
어디에선가 잠재된 색채들이
현실화의 표면을 향해 우글거리며
올라오는 중이다.
「안개」와 「초」에서
작가가 쓰고 있는 것처럼,
희고 자욱한 안개 속에서는
얼룩덜룩한 유령들이
결코 드러나지 않을 눈빛을 한 채
산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흰’은 하얗지 않고
순수하지 않고 잡(雜)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흰’은 결코
더럽혀질 수 없는 것이다.
작가의 말
모국어에서 흰색을 말할 때,
‘하얀’과 ‘흰’이라는
두 형용사가 있다. 솜사탕처럼
깨끗하기만 한 ‘하얀’과 달리
‘흰’에는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함께 베어있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은 ‘흰’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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