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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풍성한 책방 : 관리자들

by 풍성한 그림 2021.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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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혁진    193    민음사

 

p13

현장에서도 걸핏하면

전화를 들고 사라지던 선길은

퇴근하고 들어와서도 매일 한두 시간씩

아들과 영상통화를 했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말투였고

목소리는 성가대원처럼 좋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남의 방에서

나는 소리가 넘어온다는 것이,

또 내 방 소리도 그렇게

넘 갈 수 있다는 것이

기분 좋은 일일 수는 없었다. 현경은

몇 번이나 망설였다.

벽을 두르려 주의를 줄까,

가서 이야기를 할까, 하지만

그 통화만 끝나면

벽 너머는 죽은 듯 조용했고

텔레비전 소리조차 넘어오지 않았다.

 

p48

선길의 모습은 몰골이라는 말이

부족하지 않았다.

수술뿐 아니라 일정,

집도의처럼

수술에 관한 온갖 일들까지

다 애를 태웠고 멧돼지만 기다리며

혼자 새워야 하는 밤은

오직 그렇게 애를 태우는 일에만

한없이 관대했다.

끝없이 밑으로 파 내려갈 뿐이라고,

아무 소용 없이

소모될 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선길은 멈출 수 없었다.

 

p78

사무실, 현장 번갈아 가며

이리 치이고 저리 박히고

스스로 생각해도

왜 이것밖에 못할까,

왜 나는 이것밖에 안되나 싶을 대조차

녀석들은 꼬리를 흔들고 반겨 줬다. ~

그런 한 대리를

소장은 한심하게 쳐다봤지만

별말 하지는 않았다.

현경과 잘 안되서 그런 모양이라고,

조금 가엾게 여겼다. 그래,

너한텐 개가 딱이긴 하지,

생각하면서.

 

 

 

p122

헐거운 진술과 증거들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쫀쫀하게 엮어 주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을

중심에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마다 한두 번씩은

믿었던 사람에게

뒤통수 맞아 본 적이 있었다.

있는 사람일수록 여유 있고

이성적이며 없는 사람일수록

무례하고 몰지각하다는 것도

요즘 세상에는 상식이었다.

편견이되 편견이 아닌 것 같은

그런 경험과 상식이 겹쳐져

선길은 구제불능의 인간으로 못박혔다.

 

p166

허전했다.

뿌듯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완전히 비어 버린 듯했다.

한 가지 생각만 떠올랐다.

죽음에 합당한 것은

진실밖에 없다. 죽음은

어떤 것으로도

번복할 수 없는 진실이므로,

진실이라는 소장 같은 사람이

입에 올려서는 안되는말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였고

현실이란 늘 그랬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야 할 일이

달라질 수도 없었다.

허가나,

하지 않을 뿐.

하늘은 어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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