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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풍성한 책방 : 밧줄

by 풍성한 그림 2022.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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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아우스 템 지펜  198  바다출판사

 

p15

산책을 하던 베른하르트가

멈칫하며 걸음을 멈췄다.

전나무숲과 맞닿은 초원에서

뭔가 이상한 게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희미한 달빛 속에서

둘둘 말려 있는 시커먼 줄 같은 게

풀 사이로 지나가고 있는 게

어렴풋이 보였다.

모양새가 보면 딱 기어가는 뱀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대체 뭐란 말인가?

베른하르트가 이마를 찌푸리면서

주춤주춤 그쪽으로 다가갔다.

바닥에 밧줄이 하나 놓여 있었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p49

다음 날 마을에는 꼭두새벽부터

숨 막히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날이 밝기도 전에 여자들이

초원을 가로질러 숲 가장자리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한참 동안

숲 쪽으로 귀를 쫑긋 세우고

기다리다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밧줄이 시작된 곳에는

사람의 발길이 끊길 때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남자들이 숲에서 나오는 모습을

최대한 빨리 알 수 있도록

누군가는 계속

그곳을 지키고 있어야 한다고

이심전심으로 생각한 것이다.

 

p108

아그네스는

베른하르트를 비롯한 원정대가

지금쯤 밧줄 옆에서 노숙할 준비를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정말 아무 일 없는 걸까?

밧줄이 깜깜한 어둠을 뚫고

무서운 일직선이 되어

남자들을 향해 팽팽하게 이어졌다.

열심히 이 밧줄을 쳐다보고 있으면

베른하르트와 함께

봄을 맞을 수 있을까?

머나먼 거리를 뛰어넘어

남편한테 가닿으려는 자신의 마음을

베른하르트가 느낄 수 있을까?

 

p148

농부들은 잠자리에 누워 꼼짝도 않고

잠을 청했지만 마을 생각이

머리에서 영 떠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잠이

쉽사리 올 것 같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그들은 이번 원정이

몹시 주제넘은 짓이었다고 느꼈다.

불확실한 것에 운명을 걸고

길을 떠난 것은 철없는 짓이었다.

멍청하고 위험한 게임에

목숨을 건 셈이었다.

타당한 근거도 없이

결과가 좋을 거라고 지레짐작하고서

규칙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게임에

뛰어든 것이다. 이제 그들은

이 게임에서 자신들이 졌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달았다. 오만함이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p181

이제 은빛 나무 기둥의 너도밤나무와,

열매들이 떨어지고

부채꼴 모양의 나뭇잎에

구멍이 숭숭 뚫린 물푸레나무는

점차 줄어들고 느릅나무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느릅나무들이 어찌나 크고

무성하게 자랐는지 한낮인데도

숲속으로 빛이 절반쯤 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낮은 곳에 있는 느릅나무 나뭇가지들이

행군을 방해하고 싶은지

자꾸 농부들의 머리를 스쳤다.

그들은 발목에 쇠사슬을 차고 있는

죄수들처럼 일렬종대로

발을 질질 끌면서 터벅터벅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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