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소설

풍성한 책방 :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는다

by 풍성한 그림 2022. 12. 19.
728x90
반응형

로맹가리   319   문학동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는다/

먼바다에서 다가오는

강렬하기 짝이 없는

고독의 아홉 번째 파도에,

그 누구도 극복할 수 없는

단 한 가지 유혹이 있다면

그것은 희망의 유혹일 것이다.

그는 자기 안에 있는

젊음의 그런 유별난 집요함에

얼떨떨해진 채 고개를 내저었다.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그런 자신이 정말이지

절망적으로 여겨졌다.

 

류트/

그는 자신의 손 안에서

커져가는 공허감,

혼란스러우면서도 압도적인 어떤 갈망,

만지고 싶은,

솟구쳐 오르게 하고 싶은,

만들어내고 싶은 욕구와 싸웠다.

점차 그의 전 존재가

그 자신도 정확히 알 수 없는

무엇인가를 제멋대로일 만큼

강압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가 류트를 쓸어보았다.

다음 순간 그는

시간 관념을 송두리째 잃고

책상 앞에 서서 서투른 손가락으로

되는 대로 현을 뜯고 있었다.

 

어떤 휴머니스트/

때때로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오르고,

두 부부와 인류 전체에게 품어온

자신의 믿음을 그토록 충실히 지켜준

선량한 이들의 얼굴을

감사에 찬 눈길로 바라본다.

자신의 신념이 옳았다는 만족감 속에서

그는 양손에 충직한 친구들의 손을 잡고

행복하게 죽어가리라.

 

몰락/

지금 나는

대형 유리상자 같은 것 속에 들어가,

색깔이 시시각각 변하는

가운데 매달린 철물들이 끊임없이

맴돌고 움직이는 눈부신 천장 아래,

악몽에서 빠져나온 듯한

뒤틀린 형태의 가구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튜브와 파이프와 강철날들이 박힌

시멘트 덩어리들이

사방에서 위협적인 덩치를 드러냈고,

벽에는 불길한 얼룩 같은 색채와

뱀처럼 뒤엉킨 선들이

보는 사람의 얼굴을 후려쳐

울부짖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그림들-요컨대 틀에 끼워져 있다는

이유에서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면-

이 걸려 있었다.

 

가짜/

그는 자신이 사람을 믿지 못한다는 것,

모든 것이 자신의 놀라운 재정적 성공과

누리고 있는 권력과

독 덕택이라는 것,

자신이 아첨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조심스럽고 듣기 좋은

그런 아첨은 세상의 소문과

거리를 두게 해주긴 했지만

온갖 수상쩍은 숙덕거림을

완전히 막아주지는 못했다.

 

본능의 기쁨/

내 솔직한 의견을 말하자면,

인간이란

아직 존재하지 않습니다.

새로 만들어내야 하는 거예요.

인간이란 걸 말이죠.

언젠가 의학의 발달에 힘입어

진정한 인간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건

기형적인 존재들일 뿐이에요.

 

고상함과 위대함/

그들은 개인적인 원한을 갚기 위해

코프와 손을 잡았다.

이제 그 일은 끝났다.

명예는 실추되징 않았고,

정의가 돌아왔다.

그들은 이제부터 벌어질 일에

연루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다.

더 늦기 전에 무기와 짐을 들고

몸을 피하고 싶다.

어쩌면 선한 편, 정의의 편,

주도권을 쥔 편에

서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둘기 시민/

여행객 동무들,

당신들은 지금 남의 나라에

와 있습니다. 당신네 위대하고

아름다운 나라를 대표하고 있는 셈인데,

단정하고 품위 있는 태도로

당신네 나라에 대해

좋은 인상을 주는 게 아니라,

되레 길 한복판에서

짐승들처럼 술에 취해 있군요.

시민 동무들,

정말이지 역겹기 짝이 없군요

 

 

역사의 한 페이지/

충성스러운 슈바이크가

정중히 총독의 몸을 민다.

총독은 멜빵에 매달려 흔들린다.

충격 때문에 술이 좀 깨는 것 같다.

모범군인 슈바이크는 주의 깊은 눈길로

그가 하는 양을 바라본다.

매달리 몸뚱이가 연신 흔들린다.

그 규칙적인 움직임이

슈바이크에게 현기증을 일으키는지

그는 상관의 다리를 꼭 붙잡는다.

흔들림이 멎을 때까지,

이윽고 슈바이크는

상관의 몸으로부터 돌아선다.

 

-빨막한 크리스마스 이야기/

얼어붙을 듯한 방 안에서

사망확인서를 쓰기 위해

탁자 위에 앉았을 때,

신경질적인 글씨로 빼곡한

몇 장의 종이가 내 시선을 끌었네.

힐끗 눈길을 주었다가

문득 관심이 끌려 그것을 읽기 시작했네.

그 불쌍한 청년은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적어두었더군.

얼핏 보기에 그는

고독의 발작에 꺾이고 만 것 같았네.

 

킬리만자로에서는 모든 게 순조롭다/

난 사막이 좋아.

당신 이름을 쓸 자기가 많으니까.

목이 몹시 마르지만,

우리는 기운을 잃지 않고 있어.

구원은 언제나

마지막 순간에 온다는 걸

여행가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거든.

 

영웅적 행위에 대해 말하자면/

살다 보면 자신의

밥줄을 지켜야 할 때가 있는 법.

이 거친 세상에서 내가 갖고 있는 것은

강연자로서의 명성뿐이었으므로,

그것을 지키기 위해

상어에게 잡아먹혀야 한다면

나는 그럴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마스크를 썼다.

내게 잘 맞았다. 나는 서글픈 시선으로

녹색 물결을 바라보았다.

 

지상의 주민들/

그들은 작은 트렁크 위에 앉아,

몸을 바싹 붙인 채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의 태도는 가라앉아 있었고,

갈 곳 없는 사람들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처녀는 줄곧 미소를 지었고,

나이든 남자는 눈송이를 헤아리는 듯했다.

그는 이따금 몽상에서 벗어나

요란스럽게 입김을 내뿜으며

두 팔로 가슴을 두드려대다가는

다시 조용해지곤 했다.

 

도대체 순수는 어디에/

나는 걸아다닐 만한 반경 내에서

우리네 천박한 자본주의적 사고에

전혀 물들지 않은 주민들을

수백 명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이 영리에 얼마나 무심한지

나는 마을에서 제일 좋은

초가집에 자리를 잡고,

생활에 당장 필요한

온갖 생필품을 갖추고,

전용 낚시꾼과 정원사와

요리사를 두는 그 모든 일을

지갑을 열지 않고도 가장 소박하고

가장 감동적인 형제애와

우정을 바탕으로

상호 존중 속에서 확보할 수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

그는 그 구석에 웅크리고 누워

환각-익숙하기 그지없는 물건들을

무시무시한 것으로,

들려오는 모든 소리를

죽음의 비명으로 착가하게 하는-

사로잡힌 눈길로

벽을 응시한 채

긴 시간을 보내면서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우리 고매한 선구자들에게 영광 있으라/

정신과 의사나 친구들이

그의 외모가 전혀 혐오스럽지 않다고

안심시키는 말을 할 때면

그는 격렬한 분노를 느끼곤 했다.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주름진 머리와

응결된 둥근 눈이 수치스러워서,

그는 때때로 딱딱한 껍질 아래로

머리를 집어넣고는

먹고 마시기를 거부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과학의 순교자라고

불리는 것이 끔찍했다.

 
728x90
반응형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풍성한 책방 : 요리사가 너무많다  (0) 2023.03.06
풍성한 책방 : 길모퉁이 카페  (0) 2023.02.06
풍성한 책방 : 밧줄  (0) 2022.11.21
풍성한 책방 : 밑줄 긋는 남자  (0) 2022.11.07
풍성한 책방 : 도라 브루더  (0) 2022.10.17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