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토끼
정보라 355 래빗홀
저주토끼-
할아버지의 집안은,
아니 우리 집안은
명확하게 천민 취급조차 받지 못했다.
굿을 해 주는 무당도 아니고
점을 봐주는 것도 아니며
시신 염습이나 장례와도
원칙적으로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불분명하게 무속과 관련이 있는 일을 하지만
절대로 아무도 내놓고 말하지는 않고,
농기구 수리나 대장장이 일도
분명히 해주고, 그래서
뭐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게다가 잘못 건드리면
저주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소문도 돌았다.
물론 우리 집안 사람들은
절대로 개인적인 원한 관계에
저주물품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동네 사람들은 그런
우리 집안 불문율을 알 리가 없었고
안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았다.
머리-
‘머리’는 한번 나타나자
끈질기게 다시 출몰하기 시작했다.
물을 내리고 손을 씻고 있으면
뒤에서 쳐다보는 눈길을
느낄 수 있었다.
곁눈질로 볼 때는 누렇고
희끄무레한 것이 보이다가
뒤를 돌아보면 재빨리 사라졌다.
그럴 때면 변기 안에는
정체 모를 머리카락이
몇 가닥 떠 있었다.
변기와 방광염이 재발했다.
차가운 손가락-
그녀는 쏟아지는 빛 속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정면에서 다가오는,
다가온다기보다 통제력을 잃고
도로를 벗어난 날아오는 차의
운전석에 앉아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
공포에 질려 굳어버린
자신의 표정이 한순간 또렷하게 보였다.
무기력한 운전대를
꼭 움켜쥔 자신의 양손 사이에
또 다른 다섯 개의 손가락이
비웃듯이 여유롭게 얹혀 있었다.
몸하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호르몬에 이상이 생겨서 일시적으로
그렇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
초음파 결과는 정상으로 보이니까
일단 피임약을 먹어 보세요.
3주 먹고 1주 끊고,
또 3주 먹고 1주 끊고,
그렇게 두세 달만 하면
정상으로 돌아올 겁니다.”
그래서 그녀는 피임약을 먹기 시작했다.
안녕, 내 사랑-
날 찌른 것은 어느 쪽이었을까.
피 묻은 칼을
들고 있었던 건 데릭이지만,
버려지는 데 분노한 것은 1호였다.
그리고 그 1호의 기억을
모두 전달받고 아마 데릭에게도
전달해주었을 장본인은 세스였다.
그러나 셋의 구분은
이제 와서는 무의미했다. 세스와
데릭과 1호는 전부 동기화되었다.
기억과 생각 면에서도
완전히 동일했고 지금은
물리적으로도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니 셋 중 어느 쪽도 나를 위해
구급차를 불러주지 않을 것이다.
동기화되는 과정에서
로봇 공학의 기본 법칙들까지
리셋되는 게 가능한 걸까.
셋 중 단 하나가 비정상이었다는 이유로.
덫-
집을 지으면서 남자는 헛간을 부수고
그 자리에 크고 튼튼하게 창고를 지은 뒤
여우를 창고 구석의 우리 속에
쇠사슬로 묶어 두었다.
상처가 낫지 않은 채
몇 년이나 수시로 피를 뺏긴 여우는
완전히 쇠약해졌지만,
아직도 목숨은 붙어 있었다.
덫에 끼인 발목의 상처는
계속 문지르고 쑤신 탓에
가죽이 밀려나 뼈가 드러난 채로
굳어버렸고 이제는 아무리 찔러도
더 이상 피도 잘 나오지 않았다.
앙상하게 말라버린 여우는
남자가 피를 내기 위해 다가오면
원한 서린 눈으로 노려보며
으르렁거렸지만 그뿐이었다.
이미 여우는 짖거나 물기는커녕
캥캥거릴 기운조차 없었다.
흉터-
세상의 모든 소년은
살아남아 성장하면 청년이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소년도 쇠사슬이
어쩐지 점점 짧아진다고 느꼈다.
잠든 채로 자기도 모르게
팔이나 다리를 뻗으려 했다가
날카로운 쇠가 살을 파고드는 감촉과
갑자기 당기는 느낌에
깜짝 놀라 깨어나는 일이 많았다.
동굴 밖으로 끌려 나가 얼음장처럼 차갑고
번득이는 대기 속을 가를 때
자신이 손발을 허우적거리며 몸부림치자
그 힘에 못 이겨 자신을 물고 날아가는
‘그것’이 함께 휘청거리는
순간을 체험하기도 했다.
옛날 옛날에, 몇 년에 한 번씩
역병이 도는 지역이 있었다.
역병은 그 지방에서 가장 높은 산 속의
가장 깊은 동굴에 사는
괴물의 짓으로 여겨졌는데,
거대한 까마귀를 닮은 그 괴물은
수년에 한 번 매가 고플 때마다
둥지인 동굴을 나와서
그 지역을 날아 돌아다니며
곡식과 나무를 모두 먹어치웠다.
즐거운 나의 집-
아이는 건물 안에서 노는 것을 좋아했다.
이 방 저 방 열심히 돌아다니다가
어쩐지 안 보인다 싶으면
어느새 지하실에 내려가 있곤 했다.
그뿐이었다.
바깥으로는 좀처럼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가 장 보러 갈 때나
그냥 동네를 산책하러 갈 때
몇 번이고 데리고 나가보려 했으나
아이는 그때마다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그녀도 억지로 끌고 나가지는 않았다.
부부의 생계가 이 집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집의 의미는
단순히 월세 수입원부터 훨씬 큰 것이었다.
이 집이 그녀가 세상에 부딪혀
몸부림치며 일구어낸 전부였다.
그리고 남편은
그녀가 그렇게 혼자 애쓰는 동안
그녀의 등에 업혀 지냈을 뿐
아무것도 도와준 적이 없었다.
남편이 몰래 쓴 빚 2000만 원 때문에
괴로워하며 그녀는
그 사실을 차츰 깨닫기 시작했다.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
황금 배의 주인이
황금 톱니바퀴로 된 말을 타고
햇빛이 일렁이는 허공을 가로질러
황금 톱니바퀴 배로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모래사막의 왕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황금 배의 주인이 지나간 자리에는
모래땅 위에 점점이 핏자국이 남았다.
작은 불꽃처럼 끓어오르던 핏자국이
사막의 숨 막히는 햇볕 아래
순식간에 말라붙는 모습을 내려다보며
모래사막의 왕은 악의에 가득한 웃음소리가
허공에 뜬 황금 배에까지 들리도록
큰소리로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아이는 생존을 위해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자기 나름대로 파악한다.
어린아이의 지각에는
한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에 대한 세상의 호의와
인간의 신뢰 여부를 아이는
어른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이해한다.
왕자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친절하고 예의 바르지만
진심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성장했다.
왕자가 아는 한, 그것은 세상과
인간의 기본적인 특성이었다.
재회-
그는 언제나
단단히 꽉 묶어주기를 원했다.
묶는 동안에도
아픔을 참는 것이 분명했고
풀어준 뒤에는
언제나 몸에 뚜렷하게 자국이 남았다.
아무리 내가 여자고
그는 남자라고 해도,
그는 묶어주는 상대방이
그의 연인이라 해도,
그렇게 고통스럽게 꽉 묶여 있는 상태가
근본적으로 안전할 리 없었다.
그가 천천히 속삭였다.
“살아 있어도 좋다고,
허락받은 것 같아서.”
그 대답이 어쩐지 가슴 아팠기 때문에,
나는 힘껏 공들여서 그를 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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