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개의 관
무덤 속에서 실종된 유령
존 딕슨 카 511 엘릭시르 문학동네
첫 번째 관-학자의 서재
협박/
“머지않은 저녁에
누군가 당신을 방문할 거요.
동생과 엮이면
나 역시 위험에 처할 테지만,
그쪽은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소.
다시 말하지만,
누군가 당신을 방문할 거요.
그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소,
아니면 동생이 좋겠소?”
“동생을 보내,
그리고 당장 꺼져버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리모가
으르렁거렸다.
문/
문이 벽에 부딪혀
쾅 소리를 내며 되튕겼고,
방안에서는 샹들리에가 찰랑대며 흔들렸다.
밖으로 나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무언가 밖으로 나오려 애를 쓰고 있었다.
그것을 제외하면
밝은 방안은 텅 비어 있었다.
램폴의 눈에
엄청난 양의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무언가가 들어왔다.
그것은 검정색 양탄자 위에서
고통스럽게 네 발로 기어나오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다가 숨이 막힌 듯
한쪽으로 나가떨어져 움직이지 않았다.
가면/
“그는 코트 옷깃을 세우고
앞에 챙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멀리까지
잘 보이는 눈을 타고났기 때문에,
그의 코와 입의 형태와 색깔을
정확히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어린아이들이 쓰는 가면,
그중에서도 종이 죽으로 만든
가면을 쓰고 있었습니다.
길쭉하고 분홍색이 감돌았고
입이 활짝 열려 있는 가면이었죠.
그리고 관찰한 바에 따르면,
가면을 벗지 않았습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단연해도 좋을…….”
불가능/
“이런 일들 따윈 모르겠어요!
저는 현실적이고 정직한 사람이라고요!
누가 해지려 든다면,
그냥 숨어서 기다리다가
상대를 죽여버리고 말지요.
그러면 친구들이 법정에 서서
내가 어딘가 다른 곳에 있었다고
증언해줄 테죠.
누구도 가이 포크스이 날에
아이들과 함께 가면을 쓰고 노는
드레이먼 영감처럼
색칠한 가면을 쓰지 않아요.
그 무시무시한 남자처럼
명함을 들이민 다음 위층을 올라가
사람을 주이고
창밖으로 사라져버리지도 않겠죠.
이건 마치 어린 시절에 들었던 전설 같아요.”
지그소 퍼즐/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 말해주겠네.
그는 자신이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경찰이
곧 올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
그는 절대로 남겨뒤서는 안 될 것들을
잔뜩 가지고 있었던 거야.
자신을 쏜 사람을 잡거나
심지어 자시의 생명을 구하는 것보다,
그것을 없애버리는 게
훨씬 중대한 일이었다는 거지.
그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증거물을 소각하며 난로 주변을 오갔다네.
그런 연유로 소파가 뒤집어졌던 거지.
난로 앞 깔개는 물론이고 핏자국 역시…….
이제 이해하겠나?
일곱 개의 탑/
이렇게 된 거야.
여기 테드 램폴이
기묘한 손님이 찾아와
그리모를 협박하면서
‘생매장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특히 강조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어.
그리모는 이 협박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네.
그는 그 남자와 면식이 있었고,
또한 그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알았던 거야.
무슨 이유에서인지
세 구의 무덤을 그린 그림도 한 점 샀으니까.
자네가 그리모에게
누가 총을 쐈는지 물었을 때,
그는 호르바트라는 이름과 함께
소금 광산에 대해서도 뭔가 언급했었지.
가이 포크스를 닮은 방문객/
우리는 라디오를 켰습니다.
그게 실수였죠.
음악 소리가 요란했으니까요.
그리고 벽난로 앞에 앉아
카드놀이를 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초인종 소리를 들었습니다.
고개를 들어 벽난로 선반 위 시계를 보니
9시 45분이더군요.
현관문이 열렸을 때는 제가 자리에서
막 일어나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뒤몽 부인이
뭐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기다리세요. 제가 여쭤보겠습니다.’
같은 말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탄환/
탄환은 곧 보내드리겠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38구경입니다.
경찰의와 연락을 취하려 했지만,
그는 다른 사건으로 부재중이라
경정님께 보내드릴 예정입니다.
그는 사망하기 직전
의식을 회복했습니다.
그가 남긴 말은 저와 두 명의 간호사가
확인했으니 확실합니다.
하지만 헛소리를 늘어놓았을지도 모르니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저는 그와 잘 알고 지냈지만,
형제가 있다는 이야기는
난생처음 들어봅니다.
두 번째 관-
캐글리오스트로 스트리트의 수수께끼
열리는 무덤/
그리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죠.
뒤편의 새하얀 산들과 녹색이 감도는
어두운 풍경과 어우러진 무덤가는
굉장히 황량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기분이 나빴던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 무덤이 죄수들을 묻은 곳이었다면,
왜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 매장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 뿐이었죠.
코트에 묻은 피/
드레이먼이 머뭇거리며
의자 옆에 서서 코트를 벗은 후
바닥을 더듬는 듯한 동작으로
가슴 부분을 한 손으로 조심스레 짚어가자,
램폴의 눈에도 그 흔적이 보였다.
그가 입은 연회색 재킷 위에
생생한 얼룩이 튀어 있었다.
거무스름한 얼룩은 옷 옆구리께부터
오른쪽 호주머니가 있는 쪽까지 이어져 있었다.
드레이먼의 손가락은
그 자국을 발견하자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자국을 문지르다가
손가락에 묻은 얼룩을 털어냈다.
마술 살인/
사실 우리가 정확히 아는 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사실뿐이라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범행을 저지를 기회가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가 이미 결백하다고 확신했던 사람들뿐이야.
우리가 전후 이야기를 제대로 구성했다면
사실을 털어놓은 게 분명한 사람들이지.
이처럼 이 사건에는 전반적으로
꽉 막힌 구석이 있네.
그림/
“한두 해쯤 전에 그렸을 겁니다.
유독 그 사실을 잘 기억하는 까닭은,
버너비의 작업실에서 가장 큰 캔버스에
그린 그림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필요할 때마다 가리개나 칸막이 용도로
그 그림을 세워두곤 했습니다.
언젠가 제가 무엇을 표현하려 한
그림이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무언가를
사상 속에서 구현한 작품이지.’
그림에는 프랑스어 제목이 붙어 있었습니다.
우리말로 〈소금 산맥의 그림자 속에서〉
비슷한 제목이었을 겁니다.”
비밀의 아파트/
방안에는 정적이 맴돌았다.
흡사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무거운 정적이어서,
억누르던 숨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스스로도 못 믿겠다는 듯
멍한 펠 박사의 말투는
그 의심에 설득력을 더해주었다.
아래층에서 뒷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창문에는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1층 창문에 드리운 커튼 몇 장에는
장난스러운 레이스 장식이 달려 있었다.
두 채의 건물은 모두 검댕에 그을린 듯
어두운색을 띠고 있어서,
저마다 구역을 나눈 철책이
현관까지 이어져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마치 한 채의 집처럼 보였다.
교회 종소리의 가르침/
훌륭한 탈출 연기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침착하면서도 강인하고
경험까지 갖춰야 하는 것은 물론
기름칠한 번개처럼 재빨라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을
코앞에서 속여넘기는 데 얼마나
훌륭한 솜씨가 필요한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탈출 마술의 비밀을
진짜 마법 같은 불경스러운 행위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불켜진 창문/
“그중에 제가 그린 그림과
비슷한 광경이 담긴
사진이 한 장 있었습니다.
특별히 대단한 사진은 아니었지만,
그 사진에 얽힌 이야기를 들으니
악몽과도 같은 착상이 떠올랐습니다.
부정한 장소에 홀로 떨어져 있는
세 구의 무덤 말입니다.
강연자는 그 묘지를
흡혈귀의 무덤이라고 추정했습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 맹렬하게
그 착상을 캔버스 위에 옮겼습니다.
자, 나는 이 그림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상상 속의 개념을 표현한 거라고
모든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내 말을 믿는 사람이 없더군요.
그러다가 그리모가 그림을 봤는데…….”
세 번째 관-일곱 탑의 문제
카멜레온 코트/
“어젯밤에 저녁 식사를 하러
이곳에 도착한 다음 현관 벽장으로 가서
내 코트를 걸어두었어.
방수 처리가 된 코트라는 걸 기억해주게.
보통은 옷 정도 거는 일에
굳이 불을 켜진 않는 법이지.
그저 손으로 더듬어
비어 있는 고리를 발견하면,
거기에 코트를 걸어두면 끝나는 일이니까.
나도 굳이 귀찮게 불을 켤 생각은 없었지만,
마침 가져온 책 한 꾸러미를
선반에 올려두고 싶었거든.
그래서 스위치를 올려 불을 켰어.
그랬는데 맨 안쪽 구석에
평소엔 보지 못했던 코트가 한 벌
걸려 있는 게 아니겠나.
경찰이 가져간 노란색 트위드코트와
거의 같은 사이즈였지.
색만 다를 뿐,
거의 같은 옷이라고 할 수 있어.”
밀실 강의/
그리모가 기계장치가 발사한
총에 맞은 게 아니라는 건 분명해.
그렇다고 자네가 든 예처럼
권총을 굴뚝 위로 날려버린 것도 아니니,
그리모가 권총 자살을 한 것도 아니야.
우선 총구를 그 정도로 떨어뜨린 채
자기 자신에게 권총을 쏠 수는 없네.
또한 권총이 굴뚝을 통해 빠져나간 다음
지붕을 가로질러
캐글리오스트로 스트리트로 날아가
플레를 쏴 임무를 완수한 다음
땅에 떨어졌다는 것이야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굴뚝/
서재 안은 춥고 조용했고,
일몰을 맞이하는 런던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왔다.
해들리는 넓은 책상 쪽으로 다가가
다른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구겨진 종이쪽지를 책상 위에 펼쳤다.
노란색 비취 버펄로의 그림자가
비웃기라도 하듯 종이 위에 드리워졌다.
투명 인간/
내가 어제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
자존심을 구제하지 못했더라면,
바보들에게 안배된 마지막 형벌을 받아
마땅했을 정도였다네.
하지만 내가 저지른 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었어.
그 둘이 서로 결합해 실제로는
그저 흔해빠진데다 하찮기까지 할 뿐인
추악한 살인 사건을
끔찍하고 불가해한 수수께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네.
두발의 탄환/
부인,
당신이 사랑하던 남자는 죽었고.
이제는 법망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거니와,
그가 무슨 짓을 했든
충분히 대가를 치른 셈입니다.
지금 우리가, 그러니까
당신과 내가 당면한 문제는 딱 하나,
이 사실을 감춰 살아남은 사람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하는 거요.
살인에 직접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을지라도,
당신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거요.
사건 해결/
그는 상처를 살펴보았어.
밝은 트위드 코트 안감은
온통 피투성이였고,
속옷에도 파가 묻어 있었다네.
하지만 상처는 그리 대단하지 않았지.
그는 손수건과
반창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투우장에서 소뿔에 받힌
말을 치료하는 것처럼
상처를 대충 막을 수 있었다네.
그는 세상에 카로이 호르바트를
죽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이제 킬킬 웃을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생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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