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메모
“이것으로 나의 내일이 만들어질 것이다”
정혜윤 165 위고
1부 메모주의자-
나에게도
뇌라는 것이 돌아가고 있는 중이라면
최종적으로 좋은 결과를
끌어내는 데 쓰고 싶고,
죽을 때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아보고 싶은데 잘 안 된다.
나는 의미 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아쉬워하는 사람의 괴로움을 겪는다.
더 슬픈 것은 정열을 기울인 많은 일이
무의미로 끝났다는 점이다.
열정적으로 무의미한 일을 하느라
최소한 다른 무의미한 일을
하지는 않았다 정도로 위안을 삼아야 할까?
그러나 열정적이기 위해서는
동시에 무심할 수밖에 없는 것은 맞다.
깨끗이 얼굴을 씻고
영혼의 세수를 위해서
드디어 펜을 들었는데
‘근데 내가 뭘 적으려고 했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에이 설마.’
그러나 진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렴풋하다.
‘낮에 뭔가 좋은 말을 듣긴 들었는데
…그게 뭐였더라?’ 힘이 빠진다.
핸드폰에든
종이 쪼가리에든 메모해둘걸,
후회가 된다. 상실의 고통이 시작된다.
오늘 하루가 날아간 것 같다.
적어도 그 순간엔
그보다 더한 고통은 없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 고통이 싫지 않다.
내가 중요한 것을 잊었음을
무난하게 넘기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느껴서 좋다.
그래서 나의 하루를 심문한다.
그때부터가 중요하다.
『우주 만화』에서
이탈로 칼비노가 말한 것처럼
자기 자신의 변화라는
최초의 진정한 변화가 있어야
다른 변화가 뒤따르기 시작한다.
세상 무엇도 인간이 변하기 전에는
변하지 않고, 새로운 인간이 된다는 것은
매일매일의 ‘단련’의 결과다.
2부 나의 메모-
혼자서 메모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우리는 사회적 존재다.
메모는 재료다.
메모는 준비다.
삶을 위한 예열 과정이다.
언젠가는 그중 가장 좋은 것은
삶으로 부화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메모할지
아무도 막지 못한다는 점이다.
분명한 것은 메모장 안에서
우리는 더 용감해져도 된다는 점이다.
원하다면 얼마든지 더 꿈꿔도 좋다
원하다면 우리는 우리가 쓴 것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어떻게 살지 몰라도
쓴 대로 살 수는 있다.
할 수 있는 한 자신 안에 있는
최선의 것을 따라 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있지 않은가.
자신 안에 괜찮은 것이 없다면
외부 세계에서 모셔 오면 된다.
콘도르는 대체로 아침나절에
하늘을 난다고 들었다.
하지만 내 상상 속에서 꼽추는
지는 해를 배경으로 날개를 쫙 펴고
우아하고 위풍당당하게 날았다.
근사했다. 자유로워 보였다.
물론 목을 계속 기울어져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인간인 나는 어떨까?
나는 페소아 시인이 말한 것처럼
“땅 가까이 있고 싶다. 그러나 날면서.
갈매기가 그러하듯이”. 우리는 아직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른다.
우리의 가능성을 알지도 못하고 바스러진다.
그러나 세상에 있는 수많은 것들이
우리의 손길을 기다린다.
수많은 것들이 우리의 스러짐을 슬퍼한다.
수많은 것들이 우리가 해낼 수도
있었을 일을 아쉬워한다.
에필로그-
달력을 만든 인간의 마음을 잠시 생각해본다.
우리는 질서와 연속성을 사랑하고
다른 식으로는 살 수 없다.
자기만의 작은 질서, 작은 실천,
작은 의식(ritual)을 갖는 것이 행복이다.
메모는 ‘준비’하면서 살아가는 방식,
자신만의 질서를 잡아가는 방식이다.
메모는 미래를 미리 살아가는 방식,
자신만의 천국을 알아가는 방식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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