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성어 서점
김초엽 216 마음산책
서로에게 닿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선인장 끌어안기/
내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파히라는 무척이나 날이 서 있었다.
그는 나를 함부로 대했고
유일하게 접촉 통증을 덜 느낀다는
발끝을 이용해서 물건들을 밀어 던졌다.
밤이 되면 비명을 지르며
거실을 빙글빙글 돌았고
아침에는 일그러진 얼굴로
나에게 선인장을 재배열하라고 명령했으며,
배열이 지시한 것과 맞지 않다는 이유로
나에게 욕을 퍼부었다.
#cyborg_positive/
기묘한 동정과
시혜적 태도가 섞인 댓글을 볼 때면
리지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대도 대개의 댓글을 만족스러웠다.
아름답다, 예쁘다,
평범한 눈보다 사랑스럽다,
비율로 따지자면 그런 반응이 더 많았다.
유기체 눈을 가진 사람들이
리지를 동경할 때마다
리지는 가슴 깊이 꿈틀거리는
어떤 기이한 감정을 느꼈다.
이건 자긍심일까?
멜론 장구와 바이올린 연주자/
느긋한 오후가 흘러가고,
오렌지색 저녁노을이 내려앉고,
시장이 한산해졌다.
우리는 그 자리에 한참 앉아서
바이올린 연주를 들었다.
공기 중에서 끈적하고 달콤한
멜론 냄새가 느껴졌다.
시장의 상인들이 하나둘 수레를 정리하고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마지막까지 끈질기게 남아
가로등 아래를 서성이던 연인들도
모두 사라진 다음에는,
까만 어둠이 거리 위로
가구 가게의 환한 간판에서 오는 불빛만이
좌판을 비추었다.
데이지와 이상한 기계/
당신은 아주 이상한 기계를 갖고 계시네요.
정말로 이상한 기계에요.
이 기계는 지금 제가 하는 말들을
글자로 바꾸고 있어요.
그리고 당신에게 그 글자들을 보여주네요.
만약 당신이 제 말에 대답한다면,
이 기계는 그것 또한
글자들로 바꾸어서 저에게 보여주겠지요.
그런데 가만 보면 오류투성이에요.
엉망진창이고, 제대로 작동하지도 않아요.
이런 것이 왜 필요한가요?
행성어 서점/
행성어 서점이 판매하는 것은
이 행성의 특산품이다.
행성고유의 언어로 쓰인 ‘해석되지 않는’ 책들.
이 서점의 모든 책은
전자뇌의 통역 모듈을 방해하는
미세 패턴이 새겨진 글자로 인쇄되었다.
아무리 비싼 전뇌 임플란트를 삽입했다고 해도
행성어를 직접 배우지 않는 이상
서점의 책을 읽는 일을 불가능하다.
소망 채집자/
나는 막연하고 아득한 소망이 아니었다.
나는 현실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끊임없이 요동치던 것이었다.
사람들이 나에게 덧씌워 보는 것과
실제로 만드는 것은 달랐다.
나는 괴물이 되었다가
평범한 아이가 되었다.
이끄는 자가 되었다가
밀려나는 자가 되었다.
소망의 표면 아래
진짜 미래의 모습이 채워졌다.
애절한 사랑 노래는 그만/
시간 여행은 발라드 때문에 시작되었다.
발단은 음악 취향이 편협한
의뢰인의 요청이었다.
의뢰인은 자신이 무슨 처음 듣는 이름의
세련된 음악 장르의 팬이라고 밝혔는데,
유독 한국에서
발라드가 주기적으로 유행하는 현상을
분석해달라고 했다.
포착되지 않는 풍경/
누구도 기록하는 사람들을 방해하지 않았다.
여행자들은 다 같이 숨을 죽이고
바람 소리, 연필 긁히는 소리,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눈앞의 별안개가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고,
빛과 그림자가 변화하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러다 어는 순간 바람조차 완전히 멈추었고,
정적 사이에 사각사각 무언가를 쓰거나
그리는 소리만이 끼어들었다.
다른 방식의 삶이 있음을
늪지의 소년/
개별성 개체성,
그게 인간일 때의 나를
가장 불행하게 만들고 외롭게 만들었어.
동시에 나를 살아가게 했지.
개별적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전체의 일부라는 모순이 아니야.
아니면, 전체라는 건
애초에 없는 것일지도 모르지.
시몬을 떠나며/
가면이 우리에게 온 이후로
우리는 억지웃음을 지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가면은 거짓 표정을 만들어내는 대신
서로에게 진짜 다정함을
베풀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게 시몬 사람들이
여전히 가면을 쓰는 이유랍니다.
우리 집 코코/
그 생물의 모습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축축한 이끼가 뭉쳐진
거대한 모스볼 같기도 하고,
초록색 털실이나
눈 없는 햄스터 같기도 하고,
진녹색의 촉수를 사방으로 뻗친
말미잘 같기도 하고,
거대한 녹색 공벌레 같기도 해.
분명한 건 지구의 생물 중에는
그것을 완전히 빗댈 이름이 없다는 것,
오염 구역/
운무림은 일 년 내내
안개로 뒤덮여 었어 습하고,
해가 잘 들지 않아 어둡다.
적도 근처에 있어
너무 낮은 기온으로는 떨어지지 않는다.
버섯들이 자라나기에 최적의 환경이다.
이곳의 버섯들은 죽은 나무 대신
인간의 피부에 균사를 내리고 자라난다.
이상한 것은, 버섯에게 양분을 뺏기며
말라비틀어져가는 사람들이
그 버섯을 완전히 없애기를 거부한다는 점이다.
지구의 다른 거주자들/
저는 초미각자이지만,
정확히는 남들과 다른 미각을 가진 사람이에요.
이를테면 다들 달콤하게 느끼는 초콜릿과
사탕의 맛이 제게는 아주 끔찍해요.
쓴맛을 달게 느끼고
짠맛을 쓰게 느끼는 거죠.
물론 이런 식으로 간단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미각이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변형되어 있고,
그러면서도 아주 예민한 거예요.
그러니까 고통스러울 수밖에요.
가장자리 너머/
외계의 식물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그건 우리 불동조 파견자들 사이에서도
합의되지 않은 문제이지요.
당신이 지난 조사를 통해 제안한 것처럼,
기이한 균류와의
신경계 연합을 형성하는 것 역시
가능한 방법 중 하나일 거예요.
운무림 마을 사람들이 비록 보기에는
끔찍한 모습으로 살고 있다고 해도,
광증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건
정말 흥미로운 발견이었어요.
혹시 그 사람들이 삶이
하나의 답일지도 모르죠.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풍성한책방소설 : 백설공주살인사건,미나토가나에,재인 (1) | 2024.09.17 |
---|---|
풍성한책방 소설 : 빨간머리피오,마르탱파주,문이당 (15) | 2024.07.15 |
풍성한책방 소설 : 아침그리고저녁,욘포세,노벨문학사,문학동네 (12) | 2024.04.05 |
풍성한책방 소설 : 그때이미여우는사냥꾼이었다, 헤르타뮐러,노벨문학상,감시,고문,독재 (2) | 2024.03.06 |
풍성한책방 소설 : 조각들,미나토가나에 (0) | 2024.02.2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