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머리 피오
마르탱 파주 272 문이당
p7
1980년 5월 9일 피오의 미소는
어머니의 자궁을 통과했다.
이제 막 태어난 이 미소는,
허심탄하게 웃는 사람이나
일요일이 행복을 만끽하는
사람의 미소 같을 수는 없었다.
그 미소는 드문 빛줄기 아래서만,
예컨대 어슴푸레한 어둠의 장막 아래 혹은
흔히 존재하지 않는 그런 순간이나
죽기 직전
최후의 말을 하는 이들의 눈에만 드러났다.
p35
피오가 아홉 살이 되었을 때
하늘색이 또 바뀌어 버렸다.
수학 시간 중이었는데
캠핑카에 불이 났던 것이다.
그녀는 결코 숫자를 용서할 수 없었다.
소방관은 마메 할머니를 전혀 찾아내지 못했다.
어떤 트럭이 와서는
캠핑카의 잔해를 재활용 공장으로 가져가 버렸다.
보이지는 않아도 할머니의 시신이
그 안에 뒤섞여 있을 텐데,
p75
그림을 그린 것은
범죄 행위를 숨기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겉포장에 불과했던 일이
점차 열정으로 변하였고,
그 기쁨도 점점 커져 갔다.
심지어 그림을 그리기 위한 구실을 삼으려고
이런 교묘한 사기를 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p97
조라는 피오를 알게 된 이후로
조금씩 정상적이 되어 갔다.
여전히 냉소적이며,
반사회적이고 신랄했지만,
피오와 함께할 때만큼은
들판에 핀 연약한 꽃처럼 부드러워졌다.
말하는 것에
물리적 현실까지 제공하는 능력을
우정이 갖고 있음을 이들은 알게 되었다.
p114
때로 천재의 위대성이란
자신을 숨길 줄 아는 데 있다.
그는 고상해 보이면서도 심플한 옷들을
피오에게 건네주었다.
멋지게도 그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그런 옷들이었다.
피오는 그 옷들을 정중히 받았다.
그렇지만 세련되고 값비싼 이 옷들이
속박의 무게를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돈을 전혀 지불하지 않았지만,
이 옷들이 그녀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꼭 내면의 무언가를
팔아 버린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p141
인간들은 매일매일 조금씩 죽어 가니까,
예술가란 자기 자신에 대해 상중에 있다는 것일까?
이런 생각은 너무 진부하다!
게리네에스크리방이
검은 옷을 입는 까닭은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의
상중에 있기 때문이었다.
즉, 이 예술가는 세상과의 순수한 관계에,
또 타인과의 순수한 관계에 대해 상중에 있었다.
의식을 충분히 가열시켜 만든
그만의 매우 독창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p169
무엇에 따라 삶을 살아갈지
기준이 되는 그런 것을 찾아내는 것 말이야,
그건 노래가 될 수도 있을 테고,
아이스크림을 파는 상인의
음악이 될 수도 있을 테고,
어떤 추억 혹은
어떤 향기가 될 수도 있을 테지.
어찌 되었건 그것을 찾아내야만 한단다
p185
그림의 매매 가격이 하도 비현실적이어서,
피오는 놀랄 수조차 없었다.
그녀는 유감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바로 이런 것이 스타를 알아보는 것이라고,
즉 길거리에서
아무나 고개를 돌려 쳐다보게 되는
그런 사람이 스타가 아니라,
다른 스타들이 알아보는 사람이 스타라고,
보자르스키가 그녀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p209
예전에는 많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하루의 특징이었으니,
그런 점에서 그녀가 살고 있는
텅 빈 아파트의 하루는 닮은 면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아무것도 훔치지 않으면서 끼어든 도둑처럼,
요구한 적도 선택한 적도 없는 온갖 사건이
그녀의 하루하루를 연속적으로 차지하였다.
그녀의 아파트도
그와 같은 리듬으로 가득 채워졌다.
선물, 꽃다발,
책 등이 배달되었고, 우편함도 넘쳐났다.
p234
종교적인 하늘이 아닌 만질 수 있는 하늘로,
피오의 부모와 할머니의 기억을 보관하고 있는,
또 여러 가지 작은 일로
더 채워질 수도 있을 그런 하늘로,
조라는 되돌아가 버렸다.
피오는 친구의 죽음 때문이라기보다는,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을
잃어버린 자신 때문에 슬퍼졌다.
p259
피오가 지난 몇 년 동안
살아남는 데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만의 진리를
선택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느 날 그녀는
삶을 구성하고 있는 일주일과
하루라는 개념을
거침없이 확고하게 포기했다.
그 이후로 그녀에게 시간이란
자신이 감정에 따라 흐르는 것이었고,
자신이 먹거나
보는 것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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