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스 노터봄 213 문학동네
곤돌라
과거의 어떤 일이 일어났으면
대부분 현재와의 거리, 시간, 소멸,
망각이 뒤따르는 법이다.
때로 생각이 나거나
기억이 뚜렷하지 않은 게 정상이다.
다만 그 일로
마음이 편치 않은 일만 없다면
그렇게 지나가버린다.
뇌우
순식간에 여름이 지나갔다.
성(城)을 이룬 회색 구름들,
구름이 드리워 거무칙칙해진
스페인풍의 하얀 집들, 그리고
갑작스러운 정원의 침수,
비가 올 때면 그렇게 맹렬했다.
헤인즈
삶은 떠나 생(生)의 문을 닫을 때
하찮고 의미 없는 비밀들을
갖고 사라질 희망은 있다.
그 비밀이 무엇이든 간에
나는 임무를 완수했다.
인생, 그게 무슨 의미인지
누가 내게 말해줄 수 있는가?
나는 ‘인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오랫동안 깨닫지 못했지만,
어쨌든 지난 천년은
인간종(種)에게 거대한
스트립쇼였다고 생각한다.
9월 말
라디오에서 세상의 소리가 들렸고,
그녀 앞에는 세상의 모습이 보였다.
낙엽이 텅 빈 거리,
말 잘 듣는 개처럼
바람이 잦아들고 있었다.
모든 것이 원래 그대로였다.
마지막 오후
꽃잎들은 떨어지기 전에
이미 수의(壽衣)로 몸을 감싼 듯
저절로 동글게 말려 있었다.
꽃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파울라
나이가 들수록
점점 인생이란 게
상상의 산물 같아 보이기 시작하는 건
어찌된 일인가?
늙음과 죽음 둘 중 어느 것이
더 나쁘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당신은 나이들지 않았고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
재미로만 도박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도박에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다.
프레이어들의 씰룩거리는 턱,
곁눈질하는 눈빛,
누군가
갑자기 떠나려고 일어나는 모습,
지나치게 관대한 팁,
그중 매번 가장 흥미로운 건
딜러의 모습이다.
파울라 Ⅱ
무한히 먼 거리,
징표들, 형상들, 숫자들,
믿을 수 없는 고요 속의 필적,
잠시 뒤 용기를 내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물었다.
당신은 매일 밤
살고 싶지 않은 기분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고 대답했다.
당신은 반어적으로 말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밤이면 그런 순간이 찾아오는 걸
알았기에 당신은 늘 두려워했다.
당신의 목소리에서 두려움을 들었다.
가장 먼 곳
파도의 굽이침은
전쟁이며 위난(危難)이다.
바위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지고
높이 치솟는 거대한 회색파도,
부서진 파도가
높은 굉음을 내며 다가왔다
다시 허공을 날고 싶은 듯
밖으로 뛰쳐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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