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터 한트케 149 열린책들
p29
작가는 교차로에서
이례적으로 오랫동안 서 있었다.
자신의 활동을 통해
어떠한 생활 질서도
미리 그려 놓지 않는 그는
보잘것없는 나날의 움직임에도
하나의 이념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러한 이념은
두 가지, 즉 변두리와 중심을
연결시키려는 생각,
중심을 통과해서 변두리로
걸어가려는 생각과 함께 찾아왔다.
p41
갑작스럽게
대인 기피증에 사로잡힌 그는
우연히 행인을 만나자 움찔 놀랐고,
얼마 전
자신의 삶의 이력을 털어놓았던
그 누군가와의 만남을 피하기 위해
눈길을 옆으로 돌렸다.
작가는 늘 이렇게
넋 나간 사람처럼 행동했는데
물론 그런 상태를 핑계로 삼았다.
p76
그는 도시 변두리,
지붕이 얹힌 정류장 부스 속의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반듯하게 앉아
느리게 숨을 쉴수록 몸이 따뜻해졌다.
눈이 떨어지면 부스를 긁어 댔다.
부스는 잿빛으로 바랜
나무로 만든 의자 같았다.
뒷벽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흰 글씨들이 적히 벽보가
겹겹이 붙어 있었다.
p103
눈은 더 이상 내리지 않았고,
하늘은 구름 뒤에 가려져 있었다.
눈은 단단하고 두껍게 쌓여 있었다.
가로등에서 눈 녹은 물이 떨어져
우두 자국과 비슷한 무늬를 만들었는데,
미치광이의 눈에는
〈폐허 도시〉로 보였다.
p115
나는
이웃을 갖기를 바란 적이 있는가?
그는 이런 질문을 하며
잠이 든 것을 깨달았다.
목소리들이 아련히 멀어져 갔고,
대신 그에게 꿈을 들려주는
단 하나의 목소리가
소리 없이 두개골을
가득 채우며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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