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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풍성한 책방 : 소란

by 풍성한 그림 2021.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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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준    223   난다

 

p59

어느 겨울밤,

비밀로 얼룩진 생각들로

한데 모아 죄다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잘못 알고 있었어요.

비밀이란 도대체

버림을 당하는 것이 아니더군요.

코웃음 치며

다시 곁에 돌아와 앉더군요.

끈질기게 살아남더군요.

 

p86

마음이 고단할 때,

어디 내장 기관 깊숙한 곳에

구멍이라도 하나 뚫린 것처럼

몸속에서 자꾸 휘파람 소리가 들릴 때

겨울 바다에 가고 싶어진다.

가서 속에 고여 있는 온갖 찌꺼기들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 던지고 싶다.

바다는 넙죽넙죽

폐기된 마음들을 집어삼킬 것이다.

투정하지 않을 것이다.

 

p169

말은 감정과 상황과

스토리가 다 지나간 뒤에

겨우남는 찌꺼기일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든

말이 먼저인 경우는 없다.

말은 가장 마지막에 혼자 남은 자가

긁어모아 기록할 수 있는

연약한 도구일 뿐이다. 물론

말이 전부이거나 완전할 때도 있다.

선언과 예언,

잘 표현된 문학작품에서는

말의 위력이 크다. 그러나

일상에서 많은 경우

말은 참 무용지물이거나 요령부득,

사고뭉치일 때가 많다.

말보다 더 효율적이고 강한 도구는

몸이다. 몸은 말보다

적절한 언어를 더 잘 찾는다.

말은 수없이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몸은 웬만해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뒷표지

사랑이 질병인 것처럼,

내 이십대는 질병과 같았다.

슬픔도 가장 격렬한 슬픔만,

아픔만 가장 치명적인

아픔만 골라 껴안았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의 슬픔은

폭죽처럼 터져버렸고,

이미 사라졌다. 시간이 갈수록

폭죽에 대한 기억도,

귓가를 울리던 굉음도

희미해질 것이다.

 

그러나 한 시절 사랑한 것들과

그로 인해 품었던 슬픔들이 남은

내 삶의 토대를

이룰 것임을 알고 있다.

슬픔을 지나온 힘으로

앞으로 올 새로운 슬픔까지

긍정할 수 있음을,

세상을 슬픔의 힘으로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이제 나는, 겨우,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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