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 키리니 278 문학동네
첫문장 못 쓰는 남자
그가 앞으로 써나가게 될
모든 것은 바로
그 첫 문장에서 비롯될 것이고,
따라서 첫 문장을 잘못 시작했다가는
책 전체가 망가져버릴 게
틀림없었다. 첫 문장은
든든한 바위여야 했고,
모든 것을 그 위에 안정하게
구축해나갈 수 있는
견고한 화강암이어야 했다.
침입자
나는 길모퉁이에 숨어
망원경으로 마을 보면서 몇 번이나
그를 현장에서 포착하려 했다.
하지만 허사였다. 그는
나의 모든 전략을 실패로
돌아가게 만들었고,
신기에 가까운 솜씨로
자신의 시간을 관리했으며,
자신의 목표들을 반드시 이루어냈다.
투명인간 혹은 천재적인
예지력의 소유자인 그 침입자는
뭔가 초자연적인 데가 있었다.
거짓말 주식회사
때때로 나는
그의 거짓말하는 버릇 때문에
돌아버릴 것 같았다. 그와
대화를 나누는 건 레르나의 히드라와
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기회만 있으면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했고
누가 봐도
명백한 증거들조차 부인했으며,
뭐든 가리지 않고
트집을 잡으며 억지소리를 했다.
가게들(아홉 편의 짧은 이야기)
(습관) 나는 그 마을에
빵집을 차리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오전 여섯시에 문을 열었다.
내가 만든 고소한 빵 냄새가
온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나는 그 멍청한 마을 사람들에게
빵을 한 개도 팔지 못했다. 그들은
내 가게 진열창을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쳐, 내 경쟁자의 진열창 앞으로
북적거리며 서로 다투었다.
‘마티로아’호의 밀항자
토론이 시작되었다.
냉철한 합리주의자인 그들은 내가 진짜
카를 마르크스일 리가 없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면서도 내가
마르크스와 판박이처럼 닮았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며
감탄했다. 나조차도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높은곳
교수는 안주 난해한 어떤 정리를
증명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그의 몸이 붕 떠오르더니
지면에서 약 백오십 센티미터까지
올라가서 멈추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그는 강의에
너무 열중해 있어서, 자기 몸이
공중에 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박물관에서
나는 미쳐가고 있었고,
나 스스로도 그걸 어느 정도
의식하고 있었다. 이따금 씩
나는 상상의 단체 관람객을 이끌고
박물관을 안내하기도 했다.
나는 홀로 복도를 거닐며 큰소리로
관람객들에게 수 많은 전시물들을
하나하나 상세하게 설명해주기도 했다.
블록
어떤 각도에서 시도를 해보아도
동일한 조합을 두 번 연달아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유한한 수의 블록으로
무한한 수의 조합을 실현한다는 건
훨씬 놀라운 일이었다.
내 집 담벼락 속에
그가 벽에 갇히는 사고를 당한 이후로
문명이 편력해온 길은
그의 감탄을 자아냈다. 하지만
몇 주일이 흐르면서
그는 자신도 그 원인을 규정하지 못하는
우울증에 알게 모르게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최선을 다해
그의 기분을 되돌려보려 했지만,
그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다.
끝없는 도시
나는 이 도시를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답니다. 이 도시는
끝이 없으니까요. 또한 나는
이 도시를 한 번도
지루해한 적이 없습니다.
이 도시는 무한하니까요.
마지막 연주
내가 정말 단 한 번도
좋아해본 적 없는 그 우스꽝스럽고
상투적인 곡이 이제는
생존을 위한 패스포드, 나의 생명을
일시적으로 연장해주는
으뜸패가 되어 있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뻔뻔스럽게,
나는 관객들이 좋아할 만한 곡들로
끝없이 솔로 연주를 하면서
한없이 연주 시간을 늘려나갔다.
『크누센주의, 그것은 사기 협작』
80년대 이후 파리에서
크누센주의가 불러일으킨
모든 논쟁을 몇 줄로 요약하는 건
불가능하다. 거의 모든
저명한 학자나 저술가들이
크누센에 대해 말하고
그의 개념들을 해석했으며,
그들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크누센을 내세웠다.
펼쳐진 책
그의 작품들은
보거나 듣는 것이 아니라
만지면서 감상하도록 제작되었다.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관람객들은 빛이 차단된
전시실 벽에 걸려 있는 작품들을
손가락 끝으로 더듬어야 했고,
게다가 아리아드네의 실은
잡고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단검에 찔린 유명인들에 관한 안내서』
그는 패배자처럼 발을 질질 끌면서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음날도 그는 쓰라림과 분노로
뒤범벅된 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책상 앞에 앉아
『단검에 찔린 유명인사들에 관한 안내서』의
원고를 다시 붙잡았다.
정말 실패한 것일까?
물뿌리개
정말로 그 물뿌리개를 그의 삶에서
떼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 그를 곤궁해서
구해주었다는 생각이
지극히 기독교적인 만족감을 느꼈다.
우정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거다
플란의 정리
피에르와 나 그리고,
나의 자전거는 긴 대화를 나누면서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셨다.
새벽 두시경에 바텐더는
우리 셋을 내쫓았다. 우리는
하늘의 별을 세면서
인적 없는 거리를
새벽이 밝아올때까지
걷다가 내달렸다.
그로부터 삼 주 후,
나의 자전거는
이공대학으로
사직서를 제출하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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