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쿠니 가오리 191 소담
수박향기
저녁때면 나는 늘 뒷문 옆에 서 있었다.
그곳에는 키가 큰 비파나무가 있고,
머리 이어진 좁은 자갈길이 있었다.
내 마음속에서 그 길은,
그 길을 지나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후키코 씨
후키코 씨에게서는 왠지 모를
어둠의 냄새가 났다.
몸속에 깊은 우물이라도 있는 듯,
밤의 정적이라도 껴안고 있는 듯,
정체 모를 야생동물처럼 주의 깊고,
생동감이라고는 거의 없는 사람
물의 고리
여름 시즌에만 파는
‘물의 고리’라는 과자가 있었다.
직사각형의 노란색 양갱인데,
위에는 투명한 젤리를 얇게덧입혀고,
양갱과 젤리 사이에는
동그랗게 자른 레몬이 끼워져 있었다.
바닷가 마을
엄마 생일에도 아빠와 바다에 갔다.
엄마가 좋아하는 박꽃을
한 아름 따서 돌아왔는데,
엄마는 박꽃을 따면
비가 온다면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나도 많이 실망했지만,
아빠는 훨씬 더 풀이 죽었다.
남동생
눈을 감으니
한낮의 파란 하늘이 떠올랐다.
동생의 연기,
그런 연기라면
하느님 곁에 곧바로 올라갔을 것이다.
얼마나 요령이 좋은지 모르겠다.
이렇게 화창한 날에, 그렇게
기분 좋게 훨훨 날아 올라가다니.
나빴다.
호랑나비
신칸센에서 나는 부루퉁해 있었다.
특히 터널 속에서 그랬다.
시커먼 창문에 우리 셋의 모습이
-표정이 험악하고 뚱뚱한 엄마와
닭처럼 몸집이 왜소하고 궁상맞은 아빠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흉측한 딸
-굉음과 함께 비치기 때문이다.
소각로
평소에 나는 수업이 끝나면
곧장 집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하교 방송을 들을 일이 좀처럼 없었다.
어쩌다 도서실에서 책을 읽을 때
그 방송이 들리면 영 기분이 나빴다.
가슴속이 불온하게 요동쳤다,
그리고 그런 때면
늘 두 다리 사이가 써늘해지면서,
허리와 배 언저리가 텅 빈 것처럼
불안하고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재미빵
나는 가정방문이라는 행사를 좋아했다.
단순히 선생님이 학생 개개인의 집에
들어간다는 비정상적인 사태가
재미있었다. 학교는
선생님들의 마당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선생님들이 자신의 영역에서 나와
-그러면 마치
보통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어색해하는 모습이 흥미로웠다.
적어도 우리집에서는 내가 우위다.
장미 아치
나는 쉬는 시간이면
내내 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최대한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 전에는
도서실에서 빌린 책을 읽었지만,
그러면 아이들이 책을 빼앗아 가거나
바닥에 던지고 밟기도 해서 그만두었다.
하루카
하루카는 얼굴이 예뻤다.
긴 머리를 하나로 땋아
장식이 있는 고무줄로 묶고 있었다.
피부는 하얀데
입술은 신기할 정도로 빨갛고,
굵은 쌍꺼풀 아래를
긴 속눈썹이 두르고 있었다.
하루카는 얼굴이 예쁘고,
그리고 정말 느긋했다.
그림자
M과는 아홉 살 때 만났다.
초등학교 3학년 봄에
처음으로 같은 반이 되었다.
우리 반에는 절대 치마를 입지 않는
여자아이가 둘 있었다.
둘 다 보이시하게 머리가 짧았지만
활발하거나 기운찬 느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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