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맹가리 368 마음산책
1부 디부크
p13 내 이름은 콘, 징기스콘이다.
물론 징기스는 별명이다.
모이셔가 본명이지만
나처럼 웃기는 녀석에겐
징기스라는 이름이
더 잘 어울린다.
나는 유대인 희극배우다.
p50
우리 유대인들인 엄격하고
인정사정없는 신을 믿는다고 말하는 건
잘못이다. 그건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연민에 무감각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이 세상 모든사람들이 그렇듯
하느님께서도 방심하는 때가 있다.
그분도 간혹 어떤 사람을
잊어버리기도 하며
그것이 행복한 삶 하나를 만든다.
p83
나는 웃음소리를 듣지만,
그가 웃는 것인지
내가 웃는 것인지 모르겠다.
심지어 우리 둘 중 누가 생각을 하고,
누가 말을 하고,
누가 괴로워하고,
누가 잠을 자는지 모를 때도 있는데,
그럴 때 샤츠는 자신이 내 상상의 산물,
나치에 대한
내 앙심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나는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생판 일어나지 않은 일이 아닐까 하는,
그런 짧은 의혹의 순간들이 좋다.
p132
내가 영감에 이끌려 춤을 추는 동안
그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일어나
그런 나를 두 눈으로 좇는다.
그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하지만 이미 나는 모습을 감추고
내면의 내 자리로 돌아간 뒤다.
“여러분도 보셨소?
보셨소? 저자가 절 괴롭힌 게
벌써 20녀째요!
온갖 짓을 다 해보았지만
아직도 떨쳐내지 못하고 있지요.”
2 가이스트 숲에서
p182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잘모르겠다. 어떤 의식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 같고,
릴리, 플로리앙, 사랑,
가이스트 숲 모두에게
오랜 원한을 청산하려는
누군가 여기 있는 것 같다.
그가 신일 수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나 몰라라 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 자인 건
분명하니 말이다. 의식이란
인간을 전제한다. 인간이라고
생각하니 유난히 경계심이 든다.
p223
빛조차 내 주변에서 노골적이고
난폭한 양상을 취한다.
마치 모든 것을
쓸어버리려고 하는 것 같다.
이곳에 진짜 의식 같은 것이 있다는
주장까지는 하지 않겠다.
그런 일은 생각할 수 없다.
신의 느린 노후화랄까.
쉬 감동하거나,
이해심이 기어지거나,
곧잘 연민에 사로잡히는 일 등
그것이 전제하는
그 모든 것과 더불어
그를 점령해버렸을
나약함이라면 몰라도 말이다.
p274
고골의 콩트「코」에서,
문제의 코가
정당한 소유주의 얼굴에서 떨어져 나와
번쩍거리는 유니폼을 입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거리거리를
돌아다녔다는 것도
내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차르 치하의 러시아가 아니라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산당 가이스트 숲이요,
상대도 그런 아무 코하고는
비교도 안 되게 더러운,
퉤, 퉤, 퉤! 지금 같은 물골의 샤츠다.
그래서 내가 언성을 높인다.
3 징기스 콘의 유혹
p305
사람들이 내게 뭔가 아주 더러운
수작을 꾸미고 있는 거다.
너무도 평온한 느낌 때문에,
나의 모든 불안과 경계심이
대번에 되살아난다.
나는 생존 본능이 깨어나 즉각
경계태세를 취한다.
나는 대단히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펴본다.
숨은 전일의 정신으로 빛나고,
눈길 닿는 곳마다
관용과 공감뿐,
나뭇가지 하나하나도
나를 향해 내민 손 같다.
나는 온통 호의와 환대 속에 빠져 있다.
사람들을 나를 초대하고,
내 비위를 맞추고,
내게 공모의 눈짓을 보내며
‘동지!’를 연발하지만,
그러나 즉시 나는
그 의미를 깨닫는다.
p346
나는 물결을 거슬러 헤엄쳐보지만,
항거 불능의 물살이
나를 이끌고 간다.
원초의 바다가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하기야 나는 원천으로
거슬러 오를 생각도 별로 없다.
그런 원천이라면,
난 내 친한 친구들이
그러길 바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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