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247 창비
채식주의자
p18
꿈을 꿨어, 라고 아내는 두 번 말했다.
달리는 차장 너머, 터널의 어둠 위로
그녀의 얼굴이 스쳐갔다.
처음 보는 사람처럼 그 얼굴은 낯설었다.
그러나
거래처 사람에게 둘러댈 변명과
오늘 소개할 시안을 삼십 분 안에
정리해내야 했으므로,
더 이상 아내의 이상한 행동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p43
이제는 오 분 이상 잠들지 못해.
설핏 의식이 나가자마자 꿈이야.
아니, 꿈이라도 할 수 없어.
짧은 장면들이 단속적으로 덮쳐와.
번들거리는 짐승의 눈, 피의 형사,
파헤쳐진 두개골, 그리고
다시 맹수의 눈,
내 뱃속에서 올라온 것 같은 눈,
떨면서 눈을 뜨면 내 손을 확인해.
내 손톱이 아직 부드러운지,
내 이빨이 아직 온순한지.
p60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박혀 있어, 고기 때문이야.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틀림없이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몽고반점
p83
그는 문득 구역질이 났는데,
그 이미지들에 대한 미움과
환멸과 고통을 느꼈던, 동시에
그 감정들의 밑바닥을 직시해내기 위해
밤낮으로 씨름했던 작업의 순간들이
일정의 폭력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갑자기 그의 정신은 경계를 넘어,
거칠게 운전중인 택시 문을 열고
아스팔트 바닥을 구르고 싶어졌다.
그는 더 이상
그 현실의 이미지들을 견딜 수 없었다.
p101
어떻게 저런 것이
저곳에 남아있는 것일까.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약간 멍이 든 듯도 한,
연한 초록빛의,
분명한 몽반점이었다.
그것이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뜻밖에도 성적인 느낌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식물적인 무엇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나무 불꽃
p153
늦은 오후로 접어들며
빗발은 차츰 굵어졌다.
삼월의 해는
날씨 때문에 더 빨리 저물었다.
근방의 산을 구석구석 수색한
보호사들 중 하나가
영혜를 찾아낸 것은 천만다행한 일,
아니, 거의 기적이라고
동생의 담당의는 그녀에게 말했다.
깊은 산비탈의 외딴 자리에서
영혜는 마치
비에 젖은 나무들 중 한그루인 듯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고 했다.
p179
난 몰랐거든.
나무들이
똑바로 서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
이제야 알게 됐어.
모두 두 팔로
땅을 받치고 있는 거더라구.
봐, 저거 봐, 놀랍지 않아?
영혜는 벌떡 일어나서 창을 가리켰다.
모두, 모두 다 물구나무서 있어.
p206
저 껍데기 같은 육체 너머,
영혜의 영혼은 어떤 시공간 안으로
들어가 있는 걸까. ~
영혜는 그곳이 콘크리트 바닥이 아니라
숲 어디쯤이라고 생각했을까.
영혜의 몸에서 검질진 줄기가 돋고,
흰 뿌리가 손에서 뻗어나와
검은 흙을 움켜쥐었을까.
다리는 허공으로,
손은 땅속의 핵으로 뻗어나갔을까.
팽팽히 늘어난 허리가
온힘으로 그 양쪽의 힘을 버텼을까.
하늘에서 빛이 내려와
영혜의 몸을 통과해 내려갈 때,
땅에서 솟아나온 물은
거꾸로 헤엄쳐 올라와
영혜의 샅에서 꽃으로 피어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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