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329 문학동네 2021.9
1부 새 2부 밤 3부 불꽃
p12
처음 그 꿈을 꾸었던 밤과
그 여름 새벽 사이의 사 년 동안
나는 몇 개의 사적인 작별을 했다.
어떤 것들은 나의 의지로 택했지만
어떤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며
모든 걸 걸고라도 멈추고 싶은 것이다.
오래된 여러 신앙들에게 말하는 것처럼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며
기록하는 거대한 거울과 같은 것이
천상이거나 명부 어딘가에 존재한다면,
거기 담긴 나의 지난 사 년은
껍데기에서 몸을 꺼내
칼날 위를 전진하는
달팽이 같은 무엇이었을 것이다.
p44
인선이 창으로부터 눈을 돌려
나에게 말했을 때, 나 역시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눈은
거의 언제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 속력 때문일까,
아름다움 때문일까?
영원처럼 느린 속력으로
눈송이들이 허공에서 떨어질 때,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이
갑자기 뚜렷하게 구별된다.
어떤 사실들을 무섭도록 분명해진다.
p93
두 개의 물분자가 구름 속에서 결속해
눈의 첫 결정을 이룰 때,
그 먼지나 재의 입자가
눈송이의 핵이 된다. 분자식에 따라
여섯 개의 가지를 가진 결정은
낙하하며 만나는 다른 결정들과
계속해서 결속한다.
구름과 땅 사이의 거리가 무한하다면
눈송이의 크기도 무한해질 테지만,
낙하 시간은 한 시간을 넘기지 못한다.
수많은 결속으로 생겨난 가지들 사이의
텅빈공간 때문에 눈송이는 가볍다.
p135
깜박 잠들어 무릎을 놓칠 때마다
손깍지를 새로 낀다.
눈송이가 얼굴에 떨어지는 감각을
느낄 수 없다.
가는 붓끝 같은 감촉도,
눈시울을 적시는 물기도
더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p170
하나의 꿈이 사그라들기 무섭게
다른 꿈이 송곳처럼 찌르며 들어온다.
거대한 얼음의 구체球體가 된 지구가
굉음을 내며 자전한다.
끓어 넘친 용암에 덮인 대륙들이
그대로 얼어붙은 거다.
영원히
내려앉을 수 없게 된 지면 위로
수만 마리 새들이 날고 있다.
활공하며 잠든다.
퍼뜩 깨어날 때마다 날개를 퍼덕인다.
번득이는 스케이트 날들처럼
허공을 그으며 미끄러진다.
p211
다른 유골들은 대개
두개골이 아래를 향하고
다리뼈들이 펼쳐진 채
엎드려 있었는데,
그 유골만은
구덩이 벽을 향해 모로 누워서
깊게 무릎을 구부리고 있었어.
잠들기 어려울 때,
몸이 아프거나 마음이 쓰일 때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처럼.
p256
안돼. 탄식하듯
낮게 인선이 중얼거린다.
접힌 신문 스크랩 한 장을
살며시 살폈는데도
삭은 귀퉁이가 부스러졌기 때문이다.
인선이 내 쪽으로 돌려놓아준
그걸 읽으려면 무릎을 꿇고
종이에 거의 얼굴을 붙여야 한다.
촛불의 조도가 낮은데다
종이가 어둡게 변색돼,
촛불의 빛이 바로 위에 머무를 때만
사진의 형상을 알아볼 수 있다.
엎드려 고개를 숙이기 전에
나는 자신에게 묻는다.
이것을 보고 싶은가.
병원 로비에 붙어 있던 사진들처럼,
정확히 보지 않는 편이
좋은 종류의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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