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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풍성한 책방 : 작별하지 않는다

by 풍성한 그림 2022.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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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329  문학동네  2021.9

 

1부 새 2부 밤 3부 불꽃

 

p12

처음 그 꿈을 꾸었던 밤과

그 여름 새벽 사이의 사 년 동안

나는 몇 개의 사적인 작별을 했다.

어떤 것들은 나의 의지로 택했지만

어떤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며

모든 걸 걸고라도 멈추고 싶은 것이다.

오래된 여러 신앙들에게 말하는 것처럼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며

기록하는 거대한 거울과 같은 것이

천상이거나 명부 어딘가에 존재한다면,

거기 담긴 나의 지난 사 년은

껍데기에서 몸을 꺼내

칼날 위를 전진하는

달팽이 같은 무엇이었을 것이다.

 

p44

인선이 창으로부터 눈을 돌려

나에게 말했을 때, 나 역시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눈은

거의 언제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 속력 때문일까,

아름다움 때문일까?

영원처럼 느린 속력으로

눈송이들이 허공에서 떨어질 때,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이

갑자기 뚜렷하게 구별된다.

어떤 사실들을 무섭도록 분명해진다.

 

p93

두 개의 물분자가 구름 속에서 결속해

눈의 첫 결정을 이룰 때,

그 먼지나 재의 입자가

눈송이의 핵이 된다. 분자식에 따라

여섯 개의 가지를 가진 결정은

낙하하며 만나는 다른 결정들과

계속해서 결속한다.

구름과 땅 사이의 거리가 무한하다면

눈송이의 크기도 무한해질 테지만,

낙하 시간은 한 시간을 넘기지 못한다.

수많은 결속으로 생겨난 가지들 사이의

텅빈공간 때문에 눈송이는 가볍다.

 

p135

깜박 잠들어 무릎을 놓칠 때마다

손깍지를 새로 낀다.

눈송이가 얼굴에 떨어지는 감각을

느낄 수 없다.

가는 붓끝 같은 감촉도,

눈시울을 적시는 물기도

더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p170

하나의 꿈이 사그라들기 무섭게

다른 꿈이 송곳처럼 찌르며 들어온다.

거대한 얼음의 구체球體가 된 지구가

굉음을 내며 자전한다.

끓어 넘친 용암에 덮인 대륙들이

그대로 얼어붙은 거다.

영원히

내려앉을 수 없게 된 지면 위로

수만 마리 새들이 날고 있다.

활공하며 잠든다.

퍼뜩 깨어날 때마다 날개를 퍼덕인다.

번득이는 스케이트 날들처럼

허공을 그으며 미끄러진다.

 

 

p211

다른 유골들은 대개

두개골이 아래를 향하고

다리뼈들이 펼쳐진 채

엎드려 있었는데,

그 유골만은

구덩이 벽을 향해 모로 누워서

깊게 무릎을 구부리고 있었어.

잠들기 어려울 때,

몸이 아프거나 마음이 쓰일 때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처럼.

 

p256

안돼. 탄식하듯

낮게 인선이 중얼거린다.

접힌 신문 스크랩 한 장을

살며시 살폈는데도

삭은 귀퉁이가 부스러졌기 때문이다.

인선이 내 쪽으로 돌려놓아준

그걸 읽으려면 무릎을 꿇고

종이에 거의 얼굴을 붙여야 한다.

촛불의 조도가 낮은데다

종이가 어둡게 변색돼,

촛불의 빛이 바로 위에 머무를 때만

사진의 형상을 알아볼 수 있다.

엎드려 고개를 숙이기 전에

나는 자신에게 묻는다.

이것을 보고 싶은가.

병원 로비에 붙어 있던 사진들처럼,

정확히 보지 않는 편이

좋은 종류의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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