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스 카잔차키스 484 열린책들
p16
키가 크고 몸이 가는
60대 노인 하나가
유리창을 코로 누른 채 찌르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는 겨드랑이에 다소
납작해진 보따리를 하나 끼고 있었다.
내기 가장 강력한 인상을 준 것은
냉소적이면서도 불길같이 섬뜩한
그의 강력한 시선이었다.
p67
마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닭과 돼지와 나귀가 우는 소리,
사람들의 말소리가 뒤범벅이 되어
들려왔다.
나는 침대에서 뛰어 일어나며,
조르바!
오늘은 할 일이 있잖아요.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나 자신도 행복감에 정의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기적 같은 순간이 오면
인생의 모든 것은
아침처럼 산뜻해보이는 법,
대지는 부드럽고
구름은 바람에
그 모습을 끊임없이 바꾸어 갔다.
p95
조르바는 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했고 그 머리는
지식의 세례를 받은 일이 없다.
하지만 그는 만고풍상을
다 겪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 마음은 열려 있고 가슴은
원시적인 배짱으로
고스란히 잔뜩 부풀어 있다.
우리가
복잡하고 난해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조르바는 칼로 자르듯,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자르듯이 풀어낸다.
온몸의 체중을 실어
두 발로 대지를 밟고 있는
이 조르바의 겨냥이 빗나갈 리 없다.
p135
이따금 이 사람은
야만스러운 노래도 부르는데,
듣고 있노라면
우리 삶이 아무 색깔도 없어 보이고
비참하게 보이고 덧없이 느껴져
숨이 막히는 것 같아진다네.
그러나 그가
애조 띤 노래를 부를라치면
인생이란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구원의 여지가
없을 것 같은 기분도 든다네.
내 심장은 베 짜는 사람의 북처럼
가슴속에서 오락가락하는 기분이네.
이 북은
내가 크레타에서 보내는 몇 달간을
천으로 짜고 있는데
나는 (하느님이 보우하사)
행복하다네.
p156
해가 점점 짧아지면서
빛줄기는 점차 빨리 사라졌다.
그래서 오후가 저물어 가면
마음이 무거워지곤 했다.
원시적인 공포가
우리를 사로잡았다. 우리 조상들이
겨울을 맞아 날마다
짧아져가는 해를 보았을 때
느꼈을 법한 그런 공포였다.
「이렇게 짧아져가다가
내일은 아주없어져 버릴지도 몰라.」
그들은 절망적으로
이렇게 부르짖으며
그날 하룻밤을 고원에서
두려워 떨며 새웠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조르바는 그런 공포를 나보다
더 깊이 그리고
더 원시적으로 느꼈다.
이 공포에서 헤어나기 위해
그는 밤이 되어
별이 빛날 때까지
탄광의 갱도에서 나오지 않았다.
p195
나는 달빛을 받고 있는
조르바를 바라보며
주위 세계에 함몰된
그 소박하고 단순한 모습,
모든 것(여자, 빵, 물, 고기, 잠)이
유쾌하게 육화하여
조르바가 된 데 탄복했다.
나는 우주와 인간이 그처럼
다정하게 맺어진 예를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p228
나는 한동안
화살이 꿰뚫린 심장이 그려진,
향긋한 편지를 쥔 체,
그와 함께 보냈던,
그의 존재감으로 가득 찼던
나날들을 생각했다.
시간은 조르바와의 만남에
새로운 흥취를 더했다.
조르바와의 만남은
외부 사건의 수학적인 연속도,
내부의 해결할 수 없는
철학적인 문제도 아니었다.
결이 고운,
따뜻한 모래 같은 것이었다.
나는 내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빠져나가는
모래를 감촉할 수 있었다.
p264
인부들을 지휘하는 일은
조르바 같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일은
포도주가 되고 여자가 되고
노래가 되어 인부를 취하게 했다.
그의 손에서 대지는
생명을 되찾았고
돌과 석탄과 나무와 인부들은
그의 리듬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세틸렌 등불의
하얀 빛줄기를 받으며 갱도에서는
일정의 선전포고가 발동되었고
선두에서 조르바는 맨손으로 싸웠다.
그는 갱도와 광맥에다
각각 자기 나름의 이름을 붙이고
이 보이지 않는 힘에다
표정을 부여했다. 그의 손에 걸리면
갱도나 광맥도 빠져나가지 못했다.
p323
「…… 만사는 마음먹기 나름입니다.」
그가 조금 뜸을 들이고는
말을 계속했다.
「…… 믿음이 있습니까? 그럼
낡은 문설주에서 떼어낸 나무조각도
성물(聖物)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나요?
그럼 거룩한 십자가도 그런 사람에겐
문설주나 다름이 없습니다.」
나는 뇌가 기능이 더할 나위 없이
거칠고 대담한, 정신은
누군가 건드릴 때마다
불이 되어 타오르는 이 사나이에게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p352
순간순간 죽음을 삶처럼
죽으면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봄이면 선남선녀들이
4천 년 동안이나 신록 아래서
(포플러나무 밑에서, 전나무 밑에서,
떡갈나무, 참나무, 플라타너스,
키다리 종려수 밑에서) 수천 년을
더 그렇게 출 터였다.
춤추는 자는 하나지만
얼굴은 수천이었다.
나이는 늘 스물, 불사신이었다.
p392
조르바는 매일 후줄근하게 지친 채
일터에서 돌아왔다. 그는
불을 지피고 저녁을 지었고
우리는 함께 먹었다.
우리는 우리 내부에서 잠든 망령
(죽음과 공포)을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우리는 과부 이야기도
마담 오르탕스 이야기도
하느님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바다만 내려 볼 뿐이었다.
p419
조르바의 춤을 바라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무게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처절한 노력을 이해했다.
나는 조르바의 인내와 그 날램,
긍지에 찬 모습에 감탄했다.
그의 기민하고 맹렬한 스텝은
모래 위에다 인간의
신들린 역사를 기록하고 있었다.
p444
나는 행복했다.
내 창문은 바다 쪽으로 열려 있어서
달빛이 흘러 들어왔고
바다는 느긋하게 한 나머지
깊이 잠들 수 있었다.
새벽이 되기 조금 전
그 행복의 안개 속에서
조르바가 꿈으로 나타났다.
그가 무슨 말을 했던지,
왜 왔던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깨었을 때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까닭 모르게 내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나는 그와 더불어 크레타 해안에서
함께 보냈던 생활을 재구성하고,
기억을 더듬어,
조르바가 내 마음에다 뿌렸던 말,
절규, 몸짓, 눈물,
춤을 모아 보존하고 싶다는 욕망을
주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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