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해도 욕먹을 일 없는 책
은희경 227 창비
p 21 의심을 찬양함
당신이 나에대해
잘못 판단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누락 된 정보를 살려내서
나라는 존재를 재구성하고
판단해보려고 애썼지만,
당신은 무엇보다
나 같은 사람의 머릿속을
이해하지 못해요.
당신이 파악하고 있는 규칙대로
따르지 않는 종류의 인간이랄까요.
나는 주소에다 이름까지 같다는 걸
쉽사리 수긍할 만큼
성급한 사람은 아닙니다.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는
눈썰미도 있어요.
p 59 고독의 발견
이 세상에 나는
여러 개로 흩어져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에 살고 있어요.
그것들은 서로 몹시 달라요.
화를 잘 내는 나도 있고
수줍은 나도 있고 말 잘하는 나도,
어리석은 나도, 그리고
아름다운 나도 혐오스러운
나도 다 있어요. 그것들은
흩어져 존재하지만 어느 한순간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면
갑자기 사람들의 눈에 띄게 돼요.
외롭다는 생각 같은 것 말이에요.
p 96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다이어트가 어려운 것은
몸속에 정착된 수백만 년이나 된
생존본능 시스템과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몸은
철저히 지방을 모아 저장하는
돌도끼 시대는 시스템으로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 그러나
현대인의 미와 건강의 기준은
몸속의 지방을 남김없이
태워 없애는 것이다. 다이어트는
원시적 육체와 현대적 문화 사이의
딜레마일 수밖에 없다.
p141 날씨와 생활 경계
하늘은
온통 음산한 잿빛으로 뒤덮이고
가드레일이 부서져 있고
여기저기 찢어진
타이어 조각이 뒹군다.
조금 달리다 보면
검은 도로 위에
유리 파편이 흩어져 있고
그 위를 굴러다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의 잔해들을 만나게 된다.
이따금 먹이를 찾는 검은 새떼처럼
어디선가 찢어진 비닐들이 날아오른다.
길 한가운데 반 토막 남은
털 있는 짐승의 납작하고
붉은 형체가 차의 속도를 줄인다.
군데군데 검은 타이어 자국이
깊은 각도로 휘어져
차선을 벗어나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p 168 지도중독 6
예상하지 못한 공포가 있었다.
바로 침묵이었다.
온갖 생명체로 가득 차 있는
사방 몇십 킬로미터의 자연계 안에
같은 종인 인간이 전혀 없다는 것,
그것이 그처럼 엄혹하고 고독하다는
사실 역시
한 번도 사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온천을 가리키는
팻말을 본 순간
인간이 누리는 문화의 일단에
닿았다는 것만으로도
그 자리에 주저앉을 정도로
안도감을 느꼈던 것이다.
p 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 1 끝
내 삶의 많은 부분은
이미 결정돼버렸다.
회사든 가정이든 이제
내 인생에 변수는 거의 없다.
파산이나 이혼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일이 생겨도
나라는 사람이 크게 변하지는
않는다는 의미이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이 될 수 없을 바에야
모험심과 열정 따위는 필요 없게
되며 따라서
현상유지 이상의
에너지가 분비되지 않는다.
어느 정도 정점에 이른 사람은
완성도를 높일 수 있을지 몰라도
더이상 자신의 속에서
미지와 신비를 끌어낼 수는
없는 것이다.
두려움도 없지만
설렘 또한 없다.
행복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또한 행복한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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