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넬 울리치 402 엘릭시르(문학동네)
이별-
지옥에서 온 전차가
빨간 전조등을 빛내며
저쪽에서 방향을 틀어 후진했다.
무언가가 그 안으로 옮겨졌다.
이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아무도 사랑해주지 않는,
치워버려야 할 무언가가,
지옥의 전차 뒷문이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닫혔다.
하늘로 날아가지 못하고 불발되어
쉭쉭거리며 땅바닥에서 맴도는
독립 기념일 폭죽 같은 빨간 불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모인 사람들을 시뻘건 색으로 물들였다.
그러다 애절한 하얀색을 길게 드리우며
저 멀리 사라졌다.
첫 번째 랑데부-
캐머런이 물었다.
“자세히 살펴볼 만큼
한참 동안 붙들고 있지 않았습니다.
좀 전에 얘기했던 것처럼
화가 났거든요.
한 번에 뽑아내서 그대로 펜치를
어깨 너머로 휘둘러 어
둠 속으로 날려버렸습니다.
눈앞을 지나며 날아갈 때
언뜻 보았더니 지저분한
회색 헝겊 끈 쪼가리로
돌돌 말려 있든지,
대가리 바로 아래쪽에
끈이 묶여 있는 것 같더군요.
아주 조그맸어요.
나뒹구는 못을 보면
그런 끈들이 매달려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눈앞을 워낙 쏜살같이
지나갔기 때문에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나뒹구는 못이라.”
두 번째 랑데부-
그녀가 엉뚱한 걸 태웠다.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다.
그가 태우라고 한 수표 대신
그를 살릴 수 있는 쪽지를
태워버린 것이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실수는 아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무기명’ 수표였다.
발견된 장소가 비단
살인 현장이 아니라
다른 곳일 수 있었다.
그와 연결 고리가 없…….
세 번째 랑데부-
이 모든 사태가 시작된 작은 도시,
광장이 내다보이는
지티 잡화점의 불 밝힌 쇼윈도 앞에
유령 애인, 허깨비 같은 남자가
다시 얼굴을 비친다.
딱 하룻밤이다.
딱 하룻밤 동안 예전 그 자리에 서서
전처럼 불침번을 선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지 않고
오지 않을 사람만 쳐다보고 있다.
네 번째 랑데부-
칼텐 호텔의 시계탑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모리시 혼자였다.
늦은 시각이라 사람들이 점점 줄었다.
이러다 공연을 놓치게 생겼다.
그는 안절부절못했다.
입구까지 가서 그녀가 오는지 살피다
실망한 얼굴로 돌아오고,
다시 입구까지 갔다가
애를 끓이며 돌아오길 반복했다.
시계탑의 시계도
지나치게 자주 확인하고,
손목시계도 자주 확인했다.
그런들 소용없었다.
양쪽 시계 모두 일 초가 흐를 때마다
일 초씩만 움직이고 그만이었다.
연애의 불씨가 꺼져가는 순간이었다.
다섯 번째 랑데부-
매일 저녁 8시에 남자친구를 만났어,
광장 앞에 있는 잡화점앞에서,
거의 매일.
어쩌다 비가 억수같이 퍼붓거나
내가 화가 나면
그 아이를 못 나가게 했거든,
착한 아이라 말을 들었지.
내가 못 나가게 하면
남자친구가 여기로 찾아와
창문 아래에서 휘파람을 불었고,
그러면 그 아이가 창문을 열고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매일 만난셈이었어.
나는 모르는 척했지. ~
남자친구가 그 아이를 위해서
불던 휘파람 소리가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몰라.
지금도 귓가에 선하네.
우렁차거나 거침없지 않고
부드러운 애원조였지.
꼭 길을 잃은 새끼 올빼미처럼.
재회-
섬뜩한 남자가 서 있던 자리에
이제는 매일 밤마다 유령 아가씨가
데이트 상대를 기다린다.
잊힌 아가씨가
오지 않는 남자를 기다린다.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곳을
열심히 바라보는, 걱정과 슬픔과
절대 오지 않는 사람에 대한
애원이 담긴 눈빛,
화장수를 파는 움푹 들어간
조그만 공간에 끈질기게,
쓸쓸하게 서 있는 그녀,
어느 누구와도 시선을 맞추지 않고,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의 시선만
기다리는 두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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