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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풍성한 책방 : 익숙한 길의 왼쪽

by 풍성한 그림 2022.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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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미  203  창비

 

1부 오래된 통증-

사람은 선택적으로

기억을 지우기도 한다.

너무나 고통스러운 기억을

해마에서 지우는 건

아마도 본능적인

자기 보호일지도 모른다.

그런 일이 나에게만 일어났다면

나의 새끼손가락은 생각보다

슬픈 기억을 갖고 있는 게 분명하다.

 

내 발등에는 죽은 거미가 남긴 듯한

일그러진 자국이 있다.

오래된 거미줄 같은 흔적,

뜨겁게 살이 파였으나 기어이 아물고

기특하게 건재하여 쉰해가 넘도록

나를 지탱하고 있는 나의 발 무늬,

지독한 엄마가 나에게 나누어 준

뼈와 살의 크기.

틀림없이 내 인생의 마지막까지

함께해줄 나의 가장 낮은 몸,

언제나 최선을 선택할 머리에

충실하여 가장 좋은 곳으로

나를 데려가 주고

어떤 경우에도 내 편일 몸.

나의 발은 또 다른 나의 머리,

나이 엄마다.

 

2부 오래된 조각-

잎보다 꽃망울이 먼저 돋는 복숭아는

봉우리 때 운명이 정해진다.

하늘을 향해 맺힌 꽃망울을

피기도 전에 제거된다.

열매가 맺혀봐야 자라는 동안

모양이 뭉툭해지니 상품이

못 되는 까닭이다. 너무 촘촘히 맺힌

꽃망울도 간격을 두어야 하니

미안하지만 어떤 것은 살고 어떤 것은

떨어져야 한다. 열매로 이어지는

비바람의 과정보다도

먼저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을 겪으니

살아남은 꽃이 찬란할 수밖에.

 

아이에게 놀라운 경험이란

얼마나 소중한지.

거기에는 어른이 있었다.

먼지투성이 아이들을

새로운 세계로 이끌고

전에 없던 것을

갈구하게 만들었던 어른.

 

 

3부 이방인일 때 다가오는 것들-

익숙하지 않는 것들이 주는 두려움은

온몸의 감각을 깨울 수밖에 없다.

낯선 길과 타인에 대한 경계심은

내가 어린애처럼 세상을 보고

작은 것도 기쁘게 관찰하도록 해주었다.

늘 다니던 익숙한 길의 왼쪽에

이런 세상이 있었구나.

왜 나는 한가지 길밖에 몰랐을까.

익숙하고 편리한 게

전부가 아닌 줄 그때 이미 알았으면서

나의 오른쪽이 무너지고 있는 줄은

이렇게 몰랐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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