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쉬는 무덤
김언 아침달
시인의 말-
삼십년 만에 첫 비, 하고 쓴다.
그사이 내리던 비를
모두 무시하고 내리는 비.
내리는 비를 피해 뛰어
가는 사람들의 당황이 모두 처음 같다.
모두 처음
보는 얼굴이다.
1부
이명-
한번도 이름을 밝힌 적이 없는 벌레들이
죽은 듯이 알을 까고
죽은 듯이 알을 깨고 나와
귓속에서 눈 속으로
눈 속에서 다시 더러운 내 눈을 들여다본다
2부
몰라도 되는 것들-
내가 이때까지 신주처럼 모셔왔던 것들
도대체 모순이 없는 것들
내 안에서 가장 완벽한 것들
세상에서 나만 알고 있는 것들
이라고 믿어왔던 것들
3부
호수 여행-
나 오늘부터 호수 여행을 떠나요
당신의 아픈 호수 속으로
내몸을 밀어 넣어요
영혼은 자두나무 꼭대기에 걸어두고
나 오늘부터 여행을 떠나요
가물치보다도 긴 여행을 떠나요
4부
얼음의 표정-
세월을 녹여내면서
마지막에 남는 것이 또 얼음이다.
너무 많은 말을 숨기고 사는
우리 나이로 여든아홉, 할머니는
천천히 얼음이 굴러가는 소리를 듣는다.
얼음처럼 슬픈 동물도 없다는 건
이제 와서 우리가 내린 결론이다.
할머니는 안에서 몹시 뜨겁다.
부록
벌레교습소-
저기 있는 것이 보인다면 저기로 가십이오.
저기 있는 것 안 보인다고 해도 저기로 가십시오.
여기는 벌레가 되고 싶은 곳입니다.
여기는 벌레가 되려고 온 자들의 천국입니다.
아니면 지옥이겠지요.
뒷표지
말은 블랙홀이다.
밖에 있는 모든 것에 말에 닿는 순간,
내부가 된다.
말은 탄생하는 순간부터 내부를 거느린다.
바깥이 없다.
오로지 안을 향해서만 열려 있는 저
무궁무진한 세계에서 내 삶과 앎과
운명의 항로는 일찌감치
정해져서 여기까지 왔다.
안에 있지만, 그곳이 어디인지
모르는 세계에서 세계로의 여행.
이 시집은 그 여행의 첫 번째
표지이자 검은 얼룩이다.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을 대신한
한 점의 알록달록한 검은 얼룩.
여전히 불만스럽기때문에
아직은 할 말이 많은 얼굴, 얼굴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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