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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성한책방 시 : 숨쉬는 무덤, 김언,아침달

by 풍성한 그림 2024.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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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쉬는 무덤

 

김언 아침달

 

시인의 말-

삼십년 만에 첫 비, 하고 쓴다.

그사이 내리던 비를

모두 무시하고 내리는 비.

내리는 비를 피해 뛰어

가는 사람들의 당황이 모두 처음 같다.

모두 처음

보는 얼굴이다.

 

1

이명-

한번도 이름을 밝힌 적이 없는 벌레들이

죽은 듯이 알을 까고

죽은 듯이 알을 깨고 나와

귓속에서 눈 속으로

눈 속에서 다시 더러운 내 눈을 들여다본다

 

2

몰라도 되는 것들-

내가 이때까지 신주처럼 모셔왔던 것들

도대체 모순이 없는 것들

내 안에서 가장 완벽한 것들

세상에서 나만 알고 있는 것들

이라고 믿어왔던 것들

 

3

호수 여행-

나 오늘부터 호수 여행을 떠나요

당신의 아픈 호수 속으로

내몸을 밀어 넣어요

영혼은 자두나무 꼭대기에 걸어두고

나 오늘부터 여행을 떠나요

가물치보다도 긴 여행을 떠나요

 

4

얼음의 표정-

세월을 녹여내면서

마지막에 남는 것이 또 얼음이다.

너무 많은 말을 숨기고 사는

우리 나이로 여든아홉, 할머니는

천천히 얼음이 굴러가는 소리를 듣는다.

얼음처럼 슬픈 동물도 없다는 건

이제 와서 우리가 내린 결론이다.

할머니는 안에서 몹시 뜨겁다.

 

 

부록

벌레교습소-

저기 있는 것이 보인다면 저기로 가십이오.

저기 있는 것 안 보인다고 해도 저기로 가십시오.

여기는 벌레가 되고 싶은 곳입니다.

여기는 벌레가 되려고 온 자들의 천국입니다.

아니면 지옥이겠지요.

 

 

 

뒷표지

말은 블랙홀이다.

밖에 있는 모든 것에 말에 닿는 순간,

내부가 된다.

말은 탄생하는 순간부터 내부를 거느린다.

바깥이 없다.

오로지 안을 향해서만 열려 있는 저

무궁무진한 세계에서 내 삶과 앎과

운명의 항로는 일찌감치

정해져서 여기까지 왔다.

안에 있지만, 그곳이 어디인지

모르는 세계에서 세계로의 여행.

이 시집은 그 여행의 첫 번째

표지이자 검은 얼룩이다.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을 대신한

한 점의 알록달록한 검은 얼룩.

여전히 불만스럽기때문에

아직은 할 말이 많은 얼굴, 얼굴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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