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 종이우산을 쓰고 가다
에쿠니 가오리 275 소담출판사
p20
자살한 사람들의 이름은 공포되지 않았고,
세 사람 다 80대라는 것만 전해졌을 뿐
그들의 관계도 동기도 불분명했다.
다만 현장에는 유서가 남겨져 있고
자살이란 것만은 확실한 듯했다.
도우코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근거 없는 불안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치사코 씨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가시지 않았다.
가시기는커녕
여전히 근거 없이 의심은 제멋대로 부풀고,
스스로 자신이 좀 이상하다고 여기면서
도우코는 몇 년 넘게 못 만난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몇 번을 걸었지만
어김없이 부재중 메시지로 넘어가고
그때마다 도우코는 듣는 즉시
전화해 달라고 부탁했다.
밤이 되어서야 전화가 걸려 왔는데
어머니는 줄곧 경찰서와 대학 병원에 가 있어서
전화를 받지 못했다고 했다.
부자연스러우리만치 침착하고 조용한 음성으로
도우코에게 자기 엄마의 죽음을 알리더니,
미안한데, 하고 망설이는 듯이 말했다.
미안한데,
너랑 유우키도 와 봐야 할 것 같다, 라고.
p66
호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자
퇴근 준비가 완료되었다.
브랜델이 연주하는
하이든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도요는 그제야
거칠어진 마음이 위로받는 것을 느낀다.
피아노 소나타 마단조 34번이다.
아버지와 달리 서적에도 미술에도 흥미가 없고,
어렸을 적에 아버지가 노상 데려가고 싶어 했던
캠프나 산행도 도무지 좋아지질 않아서
아마도 아버지를 계속 실망시켰을 도요에게
클래식 음악은
아버지와 유일하게 겹치는 취미였다.
p110
도요는 소파 옆의 작은 서랍을 연다.
가위니 손톱깎이니 주소록 같은
잡다한 물건들 밑에서
하늘색 표지의 대학 노트를 꺼낸다.
아버지가
암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무렵에
병원 매점에서 구입한 노트인데
인폼드 콘센트Intormed Consent라 불리는
의사와의 면담 때마다
도요는 이 노트에 그 내용을 써 두었다.
발생한 아마의 위치와 크기, 치료 흐름과 약 이름,
부작용과 생활상의 주의점 같은 것들이다.
그림이고 글자고 볼펜 선이 흐트러져 있다.
그 모든 것을 빠짐없이 써 두기만 하면
아버지를 회복시킬 수 있다는 듯이.
페이지를 팔락팔락 넘긴 후에
도요는 노트를 휴지통에 밀어 넣는다.
이제 필요 없는 것이다.
p136
3월. 저녁 바람은 아직 차갑지만
공기도 조금씩 누그러드는 느낌이고
하늘의 색도 지난달까지와는 확연히 다르다.
하숙집까지 이어지는 길을 자전거로 달리면서
이 동네는 정말 예쁘다고,
이미 수도 없이 한 생각을 또 했다.
그 감동은 하즈키가 처음 이 땅을 밟은 5년 전과
조금도 변함없을 뿐만 아니라
가끔 느닷없이 새롭게 다가온다.
p141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두 달 반이 지나고
미도리의 생활은 표면적으로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일상이라고 하면 미도리의 경우,
집안일과 병원에 다니는 일이다.
함께 쇼팽을 하거나
점심을 먹으러 갈 만한 친구도 없고
딱히 취미라고 부를 만한 것도 없다.
아직 쉰두 살인데,
내 생활은 흡사 할머니의 그것과 같다고.
그리고 진찰권만 늘어간다.

p203
케이는 마작을 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녹색 펠트가 깔린
클래식한 마작 테이블이며
마작 패와
패끼리 부딪힐 때 나는 달그락 소리,
테이블을 둘러싼 사람들의 기척에는
기시감이 들었다.
문득 그리움이 밀물듯이 밀려오고
그것에 케이는 스스로 놀란다.
옛날, 아버지가 종종 집에 사람들을 초대해
이 놀이에 흥겨워했던 것이다.
놀이는 대개 밤새 이어지고
패를 섞는 소리며 손님들의 웃음소리가
2층 아이 방에서도 들렸다.
p250
가와이 쥰이지의 가게에 갔던 날,
미도리는 자신들 가족의 입장과 감정을
그에게(혹은 누구라도 좋으니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은 줄로만 알았는데
실은 그렇지 않았다고,
그때 달콤한 탄산수를 마시면서 깨달았다.
그게 아니라 미도리는 단지 용서하고 싶었다.
아버지의 일도 자신의 일도,
그 탄산수에는 무슨 시럽이 들어 있다고 했더라.
물어봐 놓고 잊어버렸다.
옮긴이의 말
결국 죽음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것이며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는 것,
따라서 하나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도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새삼 일깨워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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