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 다산책방
p19
현남오빠에게 조남주
분위기가 갑자기 싸늘해졌다.
술자리는 급히 마무리되었고
그래도 오빠는 택시가
지은이네 먼저 들러 내려주도록 하고
저를 기숙사에 데려다주었죠.
지은이가 내기고 난 택시 안에서
오빠는 지은이가 좀 당돌한 것 같다고
했다가 버릇없는 것 같다고 했다가
싸가지 없다고 했습니다.
사실 듣기 좀 그랬어요.
그래도 제 친군데 싸기지 없다니.
p52
당신의 평화 최은영
유진은 버스 차창에 비친
자기 얼굴을 바라봤다.
화장은 들뜨고 머리칼은 부스스했다.
유진은 전화기를 귀에서 떼고
정순의 말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길고 어려운 하루였다.
서른 중반으로 갈수록
체력이 떨어져서
예전에는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었던 일들에 쉽게 치였다.
아무리 힘들어도
눈물이 잘 나도지 않았고
팔다리가 쉽게 뻣뻣해지고 저렸다.
p98
경년(更年) 김이설
끼니 때가 지나
늦은 저녁을 먹는 남편은
앞에 앉아 있는 나한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핸드폰만 들여다봤다.
골라낸 콩이 밥그릇 옆에
너저분하게 굴러다녔다.
아들아이도 콩을 안 먹었다.
아들아이도 남편을 닮아 키가 컸고,
남편은 닮아 비염이 심했고,
남편을 닮아 수학을 좋아하고,
남편은 닮아 이기적이었다.
p139
모든 것은 제자리에 최정화
나는 소독액을 꺼내
손바닥 위에 눌어붙은
누런 진물을 닦아낸 뒤에
연고를 발랐다. 손바닥 한가운데가
가뭄에 마른 땅처럼 갈라져 있었다.
손의 흉터는 언뜻 무언가
흉측스러운 외양의 생명체가
입을 벌린 모습 같기도 했다.
이러다 정말 그 안에서
뭔가 나올지도 모르겠네, 라고
나는 혼자서 농담을 중얼거렸다.
p189
이방인 손보민
그가 물었다.
그가 알고 있는 그녀는 절대
이런 식으로 틈을 보이지 않았었다.
어디를 가든, 그가 그녀를 찾기 전에
그녀가 그를 먼저 찾곤 했었다.
그가 그녀를 보호하는 게 아니라,
언제나 그녀가 그를 보호했었다.
우르르 사람들이 뛰어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그녀와
십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콘크리트 기둥 뒤로
날렵하게 이동했다.
p206
하르피아이와 축제의 밤 구병모
표는 한숨을 몰아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처음 와보는 섬의 낯선 도시,
일시적으로 몸 가릴 방패라곤
언제 눈앞에서 신기루처럼
흩어질지 모를 미로 같은 골목길뿐,
바깥세상의 광란,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 의상,
전화도 지갑도 없이
총체적 난국이었다.
난국 타개를 위해 선결되어야 할 것이
사태 파악이었으나
눈앞의 절대적인 불가해 앞에서는
어떤 묘안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터였다.
p262
화성아이 김성중
사진을 전송하고 난 다음에는
우주에서 모아온 소리를 재생해
함께 들었다,
어쩌다 우주선의 교신이
걸려들 때는 무척 기뻤다.
쌍둥이 로봇들은
자신들이 전송하는 푸른 별에
막연한 애정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애정’이라는 말을 알았고,
‘그리움’이라는 말도 알았다.
그것은 끝없이 한 방향으로
데이터를 송신하는 행위였다.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풍성한 책방 : 기도의 막이 내릴 때 (0) | 2020.10.29 |
---|---|
풍성한 책방 : 이반 데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0) | 2020.10.28 |
풍성한 책방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0) | 2020.10.26 |
풍성한 책방 : 혈통 (0) | 2020.10.26 |
풍성한 책방 : 가면산장 살인사건 (0) | 2020.10.26 |
댓글